4부. 사랑해요, 강 매니저

#1장

SG 리젠시 호텔 로비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준혁에게 홍 비서가 달려왔다.

“2337호입니다. 23층 복도 맨 끝에 있구요, VIP 전용 엘리베이터 타시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바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23층은 프라이버시가 완벽하게 보장되는 executive floor였다. 준혁은 홍 비서가 내민 객실 카드를 받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수고했어, 홍 비서. 내일 회사에서 보자.”

“내일 회사 나오시게요? 천천히 쉬십쇼. 내일 일정도 모두 빼놓겠습니다.”

“뭐?”

“저도 그 정도 센스는 있다구요. 만리장성 쌓으셔야죠!”

“….”

그래, 고맙다. 준혁은 홍 비서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가 VIP용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홍 비서는 핸드폰을 꺼냈다.

“손 매니저님, 상무님 지금 올라가셨습니다. 은재 씨도 도착했겠죠? 어디 계세요, 잠깐 뵙죠.”

2337호 객실 안. 소파에 걸터앉은 은재는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을 찍어내던 티슈도, 눈가도 어느 정도 말랐다.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된 듯,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잠깐의 만남 후에, 두 사람은 각자 위치를 바꾸었다. 혹시라도 모를 기자들의 시선을 피해야 했으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 곧 따라갈게.”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왜 이리 더디게만 느껴지는지. 왠지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자꾸 심장이 조여 왔다.

그때였다. 띠리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객실 문이 열렸다. 은재는 자기도 모르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블랙 슈트를 말끔하게 입은 준혁이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상기된 얼굴로 서 있는 그는, 급하게 뛰어온 듯 호흡이 거칠고 불안정해 보였다. 그의 강렬한 시선이 은재에게 꽂혔다.

“오빠….”

은재는 떨리는 음성으로 준혁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준혁은 성큼성큼 걸어와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은재야!”

그의 두 팔은 은재를 품에 가두고 으스러지도록 안아버렸다.

“보고 싶어서 정말… 미칠 것 같았어.”

준혁의 입술 사이로 목이 잠긴 듯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한 층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상기되었다. 객실 문에 카드를 대고 띠리리릭!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순간, 그의 심장은 아플 정도로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준혁은 은재의 머리에, 그리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보고 싶었어.”

준혁의 품에 안겨서 은재도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그의 심장은 쉼 없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준혁은 은재에게서 떨어져 그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그녀의 전부를 눈에 담겠다는 듯, 힘이 잔뜩 들어갔다.

눈, 코, 입, 이마, 볼… 네 얼굴 전부를 머릿속에 새겨 놓고 지난 3년 동안 매일 너를 그리고 또 그렸는데. 이렇게 네가 왔구나.

“내가 아는 서은재 맞지? 말해봐.”

준혁은 그녀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몇 번이고 확인하고 싶었다. 말해줘. 너가 맞다고.

“오빠 미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은재는 손을 올려서 준혁의 볼을 어루만졌다. 꿈에도 그리던 그를 마주한 은재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3년 동안 꼭꼭 숨어서 한 번을 보여주질 않았다. 인터넷을 뒤져도 그의 사진은 구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는 은재의 손에서 준혁은 반지를 발견했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끼고 있었네.”

준혁의 손가락에도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럼, 오빠가 준 거잖아.”

은재의 눈가에서 맑은 눈물이 툭 하고 흘러내렸다. 그녀를 다시금 꼬옥 안아 준 준혁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미안하다. 널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어. 내 심장은 온통 너였어.

준혁은 은재를 끌어안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은재에게 닿고, 스치고, 머금는 동안 두 사람은 꿀처럼 달콤한 느낌에 잠시나마 황홀한 기분에 젖었다.

***

호텔 로비 커피숍에서 행주는 홍 비서와 은밀한 미팅을 가졌다.

“깜짝 놀랐잖아요. 그러니까, 홍 장군님이 준혁 씨의 수행비서라는 거죠? 감쪽같이 몰랐네. 팬클럽 회원들도 알아요?”

“아하하… 모릅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상무님의 깊은 뜻이 있었죠.”

그녀는 홍 비서와 이미 구면이었다. 은재 팬클럽의 재무 담당, 홍장군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어쩐지 물량 공세가 예사롭지 않다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네. 준혁 씨가 프락치를 심어 놓은 거네요? 인제 보니 치밀하고 전략적인 분이었네.”

“프, 프락치라뇨! 무슨 섭섭한 말씀을. 사랑의 전령사라고 해두죠. 물심양면으로 은재 씨를 도우라는 상무님의 특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보 수집도 해오라는 거겠죠. 은재 소식을 시시콜콜하게 다 갖다 바쳤겠네요?”

“아하하,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행주는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앞으로 우리 공조해요.”

“네?”

“우리 은재, 저렇게 평생 혼자 살다가 늙어 죽게 놔둘 순 없어요. 뭐라도 해 봐야지.”

“넵!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상무님, 혼자서는 제 머리도 못 깎는 위인이거든요. 뭐라도 해 봐야죠.”

홍 비서는 행주의 손을 덥석 잡고 위아래로 격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앞으로의 계획을 속닥속닥 나누었다.

***

2337호 객실의 도어벨이 울렸다. 예고 없는 방문객의 등장에 준혁과 은재는 긴장했다. 준혁은 은재를 침실로 들여보내고 침실 문을 닫은 후에 객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시죠?”

가까이 가서 묻자, 밖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룸서비스 왔습니다.”

문을 열어 주니 직원이 밀고 들어오는 카트에는 와인 한 병과 카프레제 샐러드, 봉골레 파스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때 준혁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홍 비서다.

[상무님, 아름다운 시간 보내십시오. 파이팅입니다.]

메시지를 읽은 준혁은 피식 웃어 버렸다. 상사의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주는 센스쟁이 홍 비서. 가끔 오버하는 게 탈이지만 오늘은 아주 마음에 든다.

준혁은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고 잔을 채워 은재에게 내밀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

목이 갑갑한 듯, 준혁은 넥타이를 손으로 끌러서 풀고 셔츠는 단추를 위에서 세 개 풀었다. 커프스도 빼고 소매를 걷어 올리니 좀 편해졌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준혁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은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의 하얀 어깨가 손에 잡히고, 매끄러운 살결이 좋았다.

준혁에게 기대고 있던 은재는 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아까부터 그녀의 시선을 그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날렵한 턱 선과 콧날이 오늘따라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건, 헤어스타일이 바뀌어서일까.

“오빠, 머리 스타일 바꿨네.”

그녀는 무스를 발라 옆으로 넘긴 준혁의 빳빳한 머리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살랑거리며 앞머리가 이마를 덮었던 예전 스타일도 좋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느낌으로 준혁의 매력이 흠씬 풍겨왔다. 세련되고 한층 더 성숙한 남자의 이미지였다.

“많이 이상해?”

어설픈 변신이 쑥스러워서 준혁이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려고 하자, 은재가 말렸다.

“아니! 난 이 스타일도 좋은데. 멋있어.”

그래? 준혁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준혁의 시선도 역시 은재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보고 또 보아도 더 보고 싶어서 갈증이 날 정도였다.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사진 속 순백의 신부로 돌아온 듯했다. 오늘은 와인이 아니라 그녀의 예쁨에 흠뻑 취할 것만 같다.

“오빠가 시상식에 올 줄은 몰랐어요.”

“첫 영화로 신인여우상이라니. 서은재 대단해. 최고의 배우가 될 거라고 했잖아.”

“오빠 덕분이야. 고마워.”

“수상소감 멋지던데. 서은재한테 그런 용기가 있는 줄은 몰랐네. 사람들이 알아채면 어쩌려고.”

“아니라고 잡아떼면 되지.”

“사람들이 퍽이나 믿겠다.”

준혁은 장난스럽게 은재의 이마에 꿀밤을 살짝 먹이며 웃었다.

용기를 내어 준 그녀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바람에 내가 오버하긴 했지만,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 잘 된 거지.

“어머니는 요새 어떠셔?”

“병원 일은 그만두셨어요. 명주 이모하고 커피숍 하시는데 일이 재미있으신가 봐요. 전보다 많이 밝아지셨어.”

“널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난다. 돈 벌어서 어머니 커피숍 차려드린다고 했었지. 효녀야. 그래서 내가 더 좋아하지.”

“너무 효녀여서 오빠가 힘든 건 아니구요?”

“그건… 노코멘트 해야겠는데.”

정곡을 건드린 은재의 자조적인 말을 준혁은 반 농담으로 넘겼다.

그러게, 어머니가 언제쯤 날 받아주실까.

“얼마 전에 복지관에서 오빠 어머니를 만났어요. 전에는 몰랐었는데, 어머니…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윤희를 만난 후로 은재는 마음이 서서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은재는 윤희에 대해 더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기를 바랬다.

결국은 아빠가 사랑했던 사람이고 준혁의 어머니이니까.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가해자는 없고 우리 모두가 피해자인 건 아니었는지.

은재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상황을 앞으로 어떻게 풀어야 할까. 엄마 앞에서는 아직 준혁의 얘기를 비출 수 없었다.

준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은재는 손에 든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준혁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은재의 발목을 잡고 있는 매듭이 풀리지 않는 한, 그녀가 자신에게 올 수도, 설령 온다고 해도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따라갈게.”

“어려워.”

“무리하진 마.”

“오빠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원하는 걸 듣고 싶어?”

“응.”

“나야 당장 너 데리고 오고 싶지. 네가 지겨워서 도망가고 싶을 때까지 평생 옆에 딱 붙어서 살 거다.”

은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농담 말구요….

“그럼 약속 하나만 해줘.”

피식 웃던 준혁의 얼굴에서 금세 웃음기가 사라졌다.

“반드시 나한테 돌아온다고 약속해. 그럼 나도 버티고 기다릴게. 네가 내 옆에서 행복할 자신이 있을 때, 그때 나한테 와.”

은재가 눈을 떴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언제 잠이 들었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려서 보니 준혁은 곤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은재는 그가 누워있는 쪽으로 몸을 틀어서 돌아누웠다.

바로 앞에 보이는 얼굴.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그를 마음껏 쳐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각을 깎은 듯한 준혁의 얼굴을 보면서 감탄하고 그의 멋짐에 설레다가 은근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에서부터 천천히 선을 그으며 내려왔다. 언덕을 내려와서 미간 아래에 푹 파인 고랑을 딛고 다시 오뚝한 콧날을 따라서 올라갔다. 거기서 다시 스키점프, 그리고 입술로 착지.

장난을 치고 있는데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짙고 선명한 눈썹 아래로 굳게 닫혀 있는 눈, 피곤했는지 쌔근쌔근 숨소리도 들렸다.

“오빠?”

작은 목소리로 불러 보지만 그는 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혼자 놀기는 계속되었다. 은재는 준혁의 손을 잡아 올려서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볼에 대어 보았다. 따뜻한 감촉이 볼에 전해오고 같이 있으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오빠만 내 옆에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리고 마지막 터치. 그녀는 준혁의 볼에 아주 살짝 입술을 대었다가 떼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서 보니 창밖에 하얀 무엇인가 날리는 것 같았다. 뭐지? 다시 자세히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침대에서 빠져나오려는데 그녀의 팔을 낚아채는 손이 있었다.

“어딜 가?”

여전히 눈은 감은 채, 그가 붙잡았다.

“자는 거 아니었어요?”

“이리 와, 같이 있어.”

확 당기는 준혁의 힘에 밀려 은재는 다시 침대 속으로 끌려 들어오고 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감아서 품에 꼭 안았다. 다시 밀착.

“자고 있는 사람한테 무슨 장난질이야?”

“자는 척 한 거예요? 와, 사기다.”

“적반하장이네.”

“나갈래.”

은재가 준혁에게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뒤틀었다.

“안 돼.”

준혁은 더 세게 안아서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왜, 또, 뭐?”

“옆에 있어. 일분일초가 아까우니 너의 이탈을 불허한다.”

사랑해! 그가 웃으면서 은재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입에 가득 머금으며 은재도 준혁의 가슴 속으로 쑤욱 안겨버렸다.

사실 준혁은 은재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밤새 선잠을 잔 그였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은재를 옆에 두고 맘 편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위인은 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