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주제넘으신 분이네요.”'혜준은 입술 끝을 비틀며 비아냥거렸다.'“알아요. 그런데 화가 나네요. 정우는 저녁을 먹을 때도, 여기 와서 술을 마실 때도 늘 혜준 씨만 보고 있었어요. 혜준 씨가 조금이라도 불편할까 봐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을 썼어요. 혜준 씨 숟가락에 반찬까지 올려주더군요. 그런데도 혜준 씬 당연하다는 듯이 받기만 할 뿐, 한 번도 정우를 챙겨주지 않았어요. 지금도 봐요, 정우의 기분 같은 거 아랑곳 않고,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그 쉬운 대답 한 번 제대로 안 해 주고 제멋대로 굴잖아요. 혜준 씬 정우를 사랑하지 않아요. 정말 정우를 사랑한다면 그럴 순 없는 거예요.”'순간 혜준은 강한 둔기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아닌가요? 내 생각이 틀렸어요?”'혜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약이 바짝 올랐지만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그녀는 정우가 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말로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제대로 미안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충격을 받은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는 혜준을 지켜보고 있던 명숙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런 혜준 씨 때문에 결국 정우가 상처를 입고 말 거예요. 일방적인 사랑은 상처만 남기고 끝날 수밖에 없으니까요.”'‘상처라고? 내가 그 사람에게?’'그 순간, 심장이 반항이라도 하듯 세차게 꿈틀거렸다. 혜준은 양 주먹을 말아 쥐었다.'‘천만에! 당신이 틀렸어! 절대 아니야! 차라리 내가 다치면 다쳤지, 그 사람을 다치게 하진 않아!’'명숙을 바라보는 혜준의 두 눈에 차가운 불꽃이 이글거렸다.'“닥쳐요! 감히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와 내 남자에 대해 함부로 말해요.”'“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난 그저 오랜 친구가 걱정되었던 것뿐이에요.”'“오랜 친구? 난, 당신 같은 여자가 제일 싫어. 온갖 착한 척은 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 속은 더럽고 시커먼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혜준의 목소리는 시퍼런 분노로 바짝 날이 섰다.'“괜한 오해하지 말아요. 내 일방적인 사랑의 대상은 윤정우가 아니니까.”'“믿어주고 싶지만 신빙성은 없어 보이네요. 난, 성인 남녀 사이의 우정 같은 거 봐줄 만큼 착한 여자가 못 돼요. 특히 내 남편한테 사심 있는 여자는 더더욱. 당신이 내 남편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도 싫고, 그 사람한테 반말하는 것도 욕지기가 올라올 만큼 화가 나요.”'“그런 것 같네요.”'명숙의 얼굴엔 아픔이 스치고 지나갔다.'“나, 정우 씨가 그쪽을 만나지 못하게 할 거예요. 그러니까 괜한 데 감정 소모하지 말아요.”'할 말을 마친 혜준은 명숙의 대답도 듣지 않고, 외투와 핸드백을 챙겨 일어났다. 그리고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는 정우 쪽으로 먼저 다가갔다.'“계산 다 했어요? 그만 나가요.”'혜준은 찬바람이 날 정도로 휑하니 문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곧바로 정우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 옆에 섰다.'“밖이 많이 춥던데, 외투 단단히 입었어?”'그녀가 명숙에게 퍼부었던 말을 들었을 텐데도, 정우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목소리 역시 평소와 똑같이 다정했다. 혜준은 자신도 모르게 방금 전 나왔던 호프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창 너머 명숙이 쓸쓸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혜준은 그런 명숙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결국 자신도 민주가 했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감정 같은 건 아랑곳 않고 제멋대로 굴고, 함부로 말해서 상처를 주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올라왔다.'질투심에 눈이 멀어 자존심도 부끄러움도 모두 내던져버리다니.'“혜준아?”'정우가 혜준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놔요. 만지지 말아요!”'혜준은 어깨에 올려진 정우의 손을 세차게 밀쳐내고 감정을 폭발시켰다.'“당신 때문이야! 왜 이렇게 날 바보처럼 만들었어? 너무 싫어!”'혜준은 정우를 뒤에 남겨두고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윤정우란 남자 때문에, 이성까지 잃어버린 자신이 못 견디게 싫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 정우에게도 화가 났다. 더 끔찍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정우란 남자를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이다.'한참을 걷던 혜준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사거리 앞이었다. 흐릿한 가로등이 드문드문 이어진 소읍의 밤거리엔 그녀의 마음만큼 차갑고 사나운 바람이 불어댔다.'‘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정우가 옆에 있는데도 마치 낯선 곳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었다. 결혼 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외로움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혜준은 너무 무서웠다. 다시 먼 이국땅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혜준은 도망이라도 치듯 무작정 앞을 향해 걸어갔다. 정우는 말없이 그런 그녀를 따라올 뿐이었다.'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는지,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외투 속까지 파고들었다. 매서운 바람을 피해 몸을 움츠리던 혜준은 갑자기 눈앞이 노래지더니 속이 울렁거리고 울컥 토기가 올라왔다. 혜준은 다급하게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취기가 올라오는지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열이 차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하긴, 정신없이 마셔댄 날이었다.'“왜 그래? 토하고 싶어?”'정우가 다급하게 혜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혜준은 입을 더 세게 틀어막으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신물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입을 여는 순간 그대로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말 것만 같았다. 새하얗게 질려 있는 혜준의 얼굴을 확인한 정우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녀를 끌어안고 바로 옆에 있는 술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가게에 들어서자마자 혜준은 정우의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 쪽으로 내달렸다. 변기 앞에 주저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속에 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맥주뿐만 아니라 저녁 먹은 것까지 몽땅 토해 내고 신물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즈음, 혜준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비워내고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 데도,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두통과 함께 뭔가가 꽉 틀어막고 있는 듯한 갑갑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변기 앞에 쪼그리고 있던 혜준은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힘들 만큼 기운이 없었다. 순간 환청처럼 명숙이 했던 말이 귓속을 후벼 팠다.'-혜준 씬 정우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고 말 거예요. 일방적인 사랑은 결국 상처로 끝날 수밖에 없으니까요.'“아니야!”'혜준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절대 그럴 일은 없어. 어떻게 그 좋은 사람을 다치게 한단 말이야? '-혜준 씬 정우를 사랑하지 않아요. 정말 정우를 사랑한다면 그럴 순 없는 거예요.'“그게 뭐 어때서? 그 사람도 알고 시작한 일이었어!”'애써 자기변명을 해 보지만, 명숙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혜준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어댔다. 혜준은 도망치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막 밖으로 나오던 혜준의 시선 안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화장실 문과 마주보고 있는 벽에 붙은 거울 속에 끔찍한 몰골을 한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혜준은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천천히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언제부터 울고 있었던 걸까? 시커먼 마스카라가 얼굴 전체에 엉망으로 번져 있었다. 마치 추악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내면 같았다. 남의 감정을 제멋대로 이용하면서도 죄책감 하나 갖지 않는 여자, 세상을 대한 독기로 가득 찬 여자…….'‘……너도 별 수 없구나, 송혜준.’'그녀 역시 형자나 태현과 다를 바 없는 천박하고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정우는 그녀의 이런 모습조차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해 주었다. 혜준의 머릿속으로 정우와 함께 했던 수많은 장면들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힘들 때마다 내밀어주던 넓은 등과 장난기 넘치는 말 속에 담긴 깊은 마음도 보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정우는 내어줄 줄만 알 뿐 돌려받을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따뜻하게 품어주던 태섭과 애순의 얼굴도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아, 송혜준,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순간, 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오며 꺼억 꺼억 짐승의 울음 같은 흐느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혜준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이 터질 듯이 조여 왔다. 혜준은 주먹을 말아 쥐고 자신의 가슴을 힘껏 내려쳤다. 그러나 아무리 세게 때려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정우가 달려 들어왔다.'“혜준아, 왜 이래?”'그녀에게 다가앉은 정우가 사정없이 자신의 가슴을 때려대는 혜준의 손을 움켜잡았다.'“놔! 내버려 둬.”'혜준은 자신의 손을 붙잡는 정우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질렀다.'“왜 날 이렇게 만들었어? 왜, 왜 그랬어? 그냥 내버려두지 왜 내 인생에 끼어들었어?”'“혜준아, 정신 좀 차려봐.”'“놔! 싫어! 놓으란 말이야!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란 말이야!”'정우가 그에게 놓여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혜준을 와락 끌어당겨 가슴에 품었다.'“차라리 날 때려. 얼마든지 맞아줄게. 그러니까 혜준아 날 때려! 날 때리란 말이야, 이 바보야!”'혜준이 양 주먹으로 정우의 가슴팍을 세게 내리치며 울부짖었다.'“너 때문이야! 그냥 내버려두면 좋았잖아! 왜 그랬어? 왜 내 앞에 나타났어! 왜!”'혜준은 정우의 가슴팍을 때리고 또 때렸다. 그러나 정우는 피하지 않았다. 거대한 산처럼 그녀 앞에 버티고 앉아 그녀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낼 뿐이었다.'“도대체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날 이렇게 만들어놨어? 왜 너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놨어? 이런 건 내가 아닌데, 이렇게 약해 빠지면 안 되는데. 왜 널 좋아하게 만들었어? 왜 널 사랑하게 만들었냐고? 이 나쁜 놈아!”'한참을 때리던 혜준의 주먹에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더니 목소리에 담긴 분노는 쓸쓸한 울먹임으로 변해 갔다.'“나 이제 어떡하니? 당신 없인 단 일 초도 숨을 쉴 수가 없어. 아무도 필요 없었는데…….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었는데……. 세주만 있으면 되었는데……. 이제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어.”'눈물이 흐르는지 정우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졌다.'“세상이 춥기만 한 곳이 아니란 것도 알아 버렸고, 한 남자를 가슴에 담는 것이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도 알고 말았어. 난 한 번도 제대로 산 것이 아니었어. 이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내가 너무 무서워.”'정우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혜준의 양 볼을 감싸고 눈을 맞췄다. 언제나 변함없는 그 눈빛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사랑해도 돼, 혜준아. 마음껏 사랑해. 당신이 주는 그 사랑에 몇 배로 이자까지 쳐서 되돌려줄게. 그러니까 송혜준, 제발 날 좀 사랑해 주라.”'“진짜……나 당신 사랑해도 되는 거야?”'혜준은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었다.'“얼마든지. 겁먹지 마. 사랑 때문에 약해지는 사람은 없어.”'정우의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눈동자가 흔들리는 혜준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당신 바보야! 어떻게 나 같은 걸 사랑할 수 있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당신도 잘 알잖아.”'“그거, 전부 가짜잖아.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거잖아.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안 그래도 돼, 혜준아. 이젠 당신 혼자가 아니야.”'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안에 단단히 쌓아놓은 벽에 작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면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으으윽! 윤정우 당신, 진짜 나쁜 놈이야. 더 이상 도망갈 수도 없게 만들어 버렸어.”'“나,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놈이야. 당신이 내게서 도망치는 순간, 가둬서라도 내 곁에 붙잡아 놓을 거야.”'혜준은 와락 정우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으흑흑……. 미안해요, 정우 씨. 당신 사랑을 이용해서, 당신을 아프게 해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혜준은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정우는 그녀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없이 등을 토닥거렸다. 혜준은 그의 품에 안겨 울고 또 울었다. 울음과 함께 그녀 안에 있던 독기도 빠져나오는 걸까? 울면 울수록 가슴 속은 점점 더 개운해졌다.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새하얀 빛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울어댔는지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