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처음 소녀는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무마다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풍요로운 과수원 언덕, 유럽풍의 커다란 별장 저택에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었다. '그녀를 돌보는 사람이라고는 주방과 과수원을 책임지는 별장지기 부부와, 어린 그녀를 보살피는 늙은 유모만이 전부였다. 어린 아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란 소녀에게 너무 낯선 단어였다. '그렇다고 소녀에게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서울 어느 부자 동네, 하늘을 향해 치솟는 담장 안, 별장보다 더 큰 저택에서 5살이 되기 전까지 살았었다. '하지만…… 냉기가 풀풀 나는 그곳에서조차 소녀는 혼자였다. 차라리 소녀에겐 어느 날, 가정부의 손을 잡고 온 이곳이 행복했다. '“우리 불쌍한 애기씨……. 아이고, 무심한 양반. 이 어린 것 얼굴도 못 보고 눈을 감으시다니…… 이렇게 불쌍하게 내쳐질 것을 알았다면 눈이나 제대로 감으셨을까…….” '그러나 소녀의 행복과는 별도로, 늙은 유모는 비 내리는 날이면 잠든 그녀의 머리맡에서 눈물짓곤 했다. '대한민국을 호령하는 재벌 집 장녀이면 무엇 하나……. '산고 끝에 죽은 전처의 ‘딸’이 현재 부인이 낳은 ‘아들’의 숨통을 막는다는 이유로 시골 별장에서 쫓겨 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인생인 것을 말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미 없는 불쌍한 신세, 고추 하나 달고 나오게 해주시지. 그게 뭐 어렵다고 그냥 내보내 이런 홀대를 받게 하시나…….” '유모는 서울 저택의 장중보옥보다 더 귀한 도련님을 떠올리며 설움에 잠겼다. 그 설움이 잠든 소녀의 얼굴에 또르륵 떨어졌지만 소녀는 깨지 않았다. '아직은 8살, 설움과 처지의 한스러움을 알기에 소녀는 너무 어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 검은 자동차가 흙먼지를 풍기며 별장 앞에 멈춰 섰다. 아침밥이 되길 기다리며 또래 친구들이 없는 소녀가 단짝 친구인 곰 인형을 안고 늙은 유모와 앉아 도란도란 소꿉놀이를 시작할 찰나였다. '반짝거리는 구둣발로 내려선 남자는 웃음기라고는 하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보았다. 적막했지만 위협을 모르고 살았던 소녀가 지레 놀라 늙은 유모 품으로 안겨들 만큼 험악한 인상이었다. '“저 애가 이창석 회장님의 딸입니까?” '“그런데 누구슈?” '‘이창석’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소녀를 안은 유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서울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차에 태워요.” '“회장님이 그랬다면 기별이라도 주셨을 거 아니오? 느닷없이 애기씨를 달라면 누가 믿겠소!” '소녀를 안은 유모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콧방귀를 끼며 유모의 품에서 비죽 나온 소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당신이 믿든 말든 그런 것은 상관없고, 애나 얼른 줘요. 오늘 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유모!” '안전한 품을 벗어나 낯선 남자에게 강제로 차에 태워진 소녀가 겁에 질려 울부짖었다. '“나 유모한테 갈래!” '“아이고, 애기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