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_어떤 마음이 옳을까?

본능은 미지의 신세계를 경험하는 콜럼버스가 되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성은 다른 말을 했다. 결국 넌 상처받게 될 거야! 결국 넌 고통에 몸부림치게 될 거야!

‘정신 차려 이수빈!’

아는데… 너무 잘 아는데….

박지윤 씨가 보내온 물 항아리 작가의 수정 원고를 읽던 동해가 한숨을 내쉬었다. 주말 사이 영은과 나누었던 은밀한 몸의 대화가 마치 일기처럼 오롯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영은에서 소설 속 여주인공으로 바뀌었을 뿐 달라질 것 없는 내용들이었다. 어떤 마음이었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모두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그녀의 감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복잡한 마음에 몇 번 마른세수를 하고 그 끝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아… 하영은 진짜.”

아까부터 문자를 보냈지만 영은에게서 답이 없었다. 핸드폰을 쥐고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

<하영은 퇴근 시간 지났잖아. 언제 오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서툴지 않은 게 없는 여자였다. 위태롭게 보이다가도 때로는 지나치게 씩씩하기도 했다. 꽁꽁 언 호수 위에서 금이 간 줄도 모르고 스케이트를 타는 해맑은 아이처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불안했다. 예상은 했지만 하영은은 남자 경험도 없었고 어쩌면 키스마저도 동해와 처음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툴렀다. 사소한 손놀림에도 바르작대며 몸을 떨었고 감정을 숨기는 것조차 서툴러서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순수하고 솔직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미 알 것 같아서 고백하는데 난 많은 면에서 서툴러요. 사회성이 떨어져서 친절과 동정을 구분하지 못해요.’

서툰 걸로만 따지자면 동해도 나을 것은 없었다. 한 여자에게만 빠져서 20년을 넘게 허우적대고 있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여자를 마음에 담는다면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느닷없이 가슴을 파고드는 여자에 대한 본능 때문에 하영은을 안았다 하더라도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여자라서 조심스러웠고 여자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떨어져서 혹여 실수할까 두려웠다.

궁상과 청승을 무슨 트레이드마크처럼 달고 다니는 여자라서 금세라도 깨질 그릇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만큼 하영은에 대한 동해의 마음은 진지했다. 자신이 편집장이라는 사실을 영은이 알게 되었을 때의 후폭풍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조건! 완벽하게!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했어야 옳았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또다시 마른세수를 하다가 문득 박지윤 씨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작가님과 함께 저녁 먹었는데 내일 아침에 편집장님을 만나러 회사에 가겠다고 그러는데요? 회사 일 때문에 편집장님을 섭외해야 한다고.’

“나를 섭외한다고 그랬는데 이유가 뭐였을까?”

핸드폰에서 박지윤 씨 번호를 찾아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경쾌한 통화 연결 음이 울리고 잠시 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편집장님!]

“안녕하십니까. 하영은 아니, 물 항아리 작가 말인데….”

[원고 보셨죠? 완전 달라지지 않았어요? 역시 괜히 작가 하는 게 아닌가 봐요.]

말 잘라먹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박지윤 씨, 사람들 혹은 작가들과 대화할 때도 이런 식인가? 혼자 말하고 짐작하고 결론 내리고?”

[예? 아 죄송합니다, 편집장님.]

“내가 전화한 이유는 지난번에 하영은 씨가 나를 섭외한다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 무슨 말입니까?”

[어? 아직 얘기 못 들으셨어요? 작가님이 다니는 회사에서 수안시 페스티벌을 맡았다나 봐요. 아시다시피 드라마 ‘화이트’ 때문에 요즘 수안시도 핫해졌잖아요. 그것 때문에 작가와의 만남 진행해야 하는데 회사에서 섭외를 맡겼다고 한 걱정이셨거든요.]

“수안시 페스티벌?”

하필이면!

[좀 전에 작가님과 통화했어요. 편집장님께 연락드린다고 핸드폰 번호 가르쳐 달라고 해서…!]

별안간 정수리 끝이 하얘졌다.

“그래서, 번호를 가르쳐 줬습니까?”

[네.]

“그걸 가르쳐 주면 어쩝니까?”

느닷없는 편집장의 호통에 지윤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예? 번호는 상관없지 않나요?]

“하아… 쉬는데 미안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한 시선으로 시계를 보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하영은에게서 온 문자는 없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단순한 통화 연결 음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잠시 후에….]

“이런 빌어먹을! 전화 받아 하영은!”

몇 번을 걸어도 끝내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잠시 후에….]

하아… 미치겠다!

**

오피스텔 골드 옆 빌딩 1층에 예쁜 꽃가게가 오픈을 했다.

flower shop SEA.

꽃가게 이름과 어울릴 만큼 다양한 꽃송이들로 넘쳐났다. 아침부터 오가는 사람들이 꽃을 샀고 수일의 커피숍에서는 영수증을 제시하면 할인된 금액으로 커피를 판매했다. 커피 전문점 ‘the coffee’는 커피 때문에도 유명했지만 딸기 타르트 때문에도 인기가 많았다. 딸기 타르트와 푸른빛이 도는 제비꽃다발을 콜라보한 연인 세트가 특별한 광고가 없었음에도 출시 첫날부터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있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커피와 꽃향기에 취해 있던 수일이 지친 발걸음으로 들어오는 지수를 보고 미소 지었다.

“힘들었지? 핫초코 만들어 줄게. 피로가 좀 풀릴 거야.”

“고마워 오빠.”

창가에 앉아서 불빛으로 넘쳐나는 길을 보던 지수 앞에 머그잔이 놓였고 그 앞으로 수일이 웃으며 앉았다.

“이러다가 금세 부자 되겠는데.”

“그럼 좋겠네. 하아….”

감정 없이 읊조리는 지수의 말끝에 한숨이 따라붙었다.

“얼마나 더 부자가 되려고 그러는 거야, 이지수?”

“내가 부자인 것도 아닌데 뭘. 그런 오빠는 얼마나 더 많은 일을 벌일 생각이야?”

“훗, 몰라. 다양하게 많은 일을 하면서 내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을 뿐이야.”

지수가 후후 불어서 뜨거운 핫초코를 한 모금 머금었다.

“오빠, 내 의심 때문에 놓쳐 버린 사람이 있다던 말 기억해?”

“응.”

“그 사람을 만났어.”

수일이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감동해라는 남자?”

“어? 오빠도 아는 사람이야?”

“그럴 리가. 너도 그렇고 영은이도 그렇고 어찌나 그 자식 칭찬을 하는지 못 들어 주겠다.”

농담 같은 수일의 대꾸에 지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여자는 누구야?”

“훗! 뭘 하자는 건지.”

영은도 그러더니 이젠 지수까지, 두 여자가 자신에게 서로에 대해 묻고 있었다.

“영은이도 너에 대해서 묻더니 너도 궁금한 거야? 감동해라는 남자가 그 정도로 매력이 있었나?”

“그 여자 이름이 영은이구나.”

“너에 대해서도 아는 만큼 말해 줬으니 너한테도 아는 만큼 말해야 공평하겠지. 하영은. 방송그래픽 한다고 그러더라.”

“하영은….”

“말 나온 김에 넌 그 남자랑 어떤 사이야? 친구였고 가족이었다더니.”

머그잔 손잡이를 엄지로 의미 없이 긁으며 뭐라 말을 할까 생각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15년 동안은 친구였고 그 후 몇 년은….”

가볍게 잔을 거머쥔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듯 가볍게 잔을 두드렸다.

“시동생이었어. 그런데 동해가….”

단아한 여자의 눈매가 좁아지더니 눈동자에 어느새 눈물이 모여들었다.

“동해의 형과 결혼해서 살았던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나를 형수라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지수는 울고 있었다.

“며칠 전에 형수라는 말을 하더라.”

한숨처럼 흐느꼈다.

“15년의 추억은 금방 잊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잖아. 그치, 오빠?”

동의를 구하듯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눈동자를 반짝였다.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친해졌던 지수는 그때도 창밖을 보며 혼자 울곤 했었다. 마치 편의점에 앉아서 삼각 김밥을 씹으며 눈물을 삼키던 하영은처럼 억눌린 슬픔이 있는 사람 같았지만 수일은 단 한 번도 이유를 묻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물어야 했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 거야?”

지수가 흐느낌이 묻은 숨을 들이쉬었다.

“하아… 동해한테 난 한 번도 친구였던 적 없었대. 열두 살에 만나서 15년을 내 곁에만 있었어. 앞으로도 동해한테 여자는 나 하나였으면 좋겠고 나만 지켜 줬으면 좋겠어.”

“후와, 이지수 완전 이기적이다.”

며칠 전 커피숍을 마감하고 집에 가려는데 술에 취한 여자가 엘리베이터 옆에서 머리를 찧으며 서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가갔다니 영은이 낮은 목소리로 주문 같은 걸 외고 있었다.

“모시송편이다. 모시송편이다. 딸꾹! 좋은 사람인데요, 딸꾹! 본인은 그걸 몰라요, 바보같이. 딸꾹!”

“누가?”

“동해가요! 딸꾹! 동해물과 백두산이 할 때 그 동해.”

술 취한 영은을 조심스럽게 돌려세우자 비틀대며 벽에 몸을 기댔다.

“그 동해는요 예쁜 모시송편이 있어요. 딸꾹! 하지만 먹을 수 없어요. 먹어선 안 돼요! 딸꾹!”

“모시송편 먹고 싶어? 내일 내가 사줄까?”

“아니, 아저씨는 못 사줘요! 그건 세상에 단 하나 뿐이거든요.”

바닥으로 미끄러지며 주저앉는 영은을 어렵사리 업고 불 꺼진 커피숍 긴 의자에 눕혔다.

“아저씨 난요, 좋아할 수 없어요. 아니! 좋아하면 안 돼요. 딸꾹!”

“좋아하면 안 될 게 뭐야?”

“내가 좋아하면 다 떠나요. 다 불행해진다고요. 딸꾹! 행복해야죠, 나 때문에 불행하면 슬프잖아요. 좋아했다가 동해도 저기 태평양 같은 곳으로 떠나면 어떡해요. 그럼 난 어떡해요, 어떡해요.”

한참을 걱정 같은 잠꼬대를 늘어놓다가 마침내 잠이 들었었다. 자신만을 봐주길 원하는 이지수와 자신 때문에 불행해지는 게 싫어서 좋아할 수 없다는 하영은 중 어떤 마음이 옳을까?

**

아직 완전한 겨울도 아닌데 집은 겨울처럼 추웠다. 최소한의 가구는 구비되어 있었지만 언제 햇볕을 쬐였는지 매트리스는 눅눅했고 벽지도 물을 먹어서 곳곳이 얼룩져 있었다. 계약할 땐 낮이라 몰랐던 사실들이 밤에 보니까 하나하나 발견할 수 있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싸니까.

“하하하.”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새벽 3시가 겨우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삼삼오오 모여든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이었다. 건물 2층에 위치한 사무실이 인력 사무소였음을 알지 못했다. 불을 켜놓으니 창문을 가려 놓은 시트지 틈으로 남자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불을 껐다.

아직 이불을 준비하지 못해서 매트리스 위에 시체처럼 웅크리고 누워만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감동해에게서 문자를 받은 후 지윤에게 전화해서 물었었다.

[편집장님 미팅하러 갔다가 알게 됐어요. 작가님께 말하려다가 이사하신다고 해서 관뒀죠.]

“그럼 편집장님은 그 사실을 알아?”

[네, 편집장님도 그날 알게 됐어요. 작가님 불편하시다고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셔서 본의 아니게 속였네요.]

엄지손톱을 끝을 잘근 씹었다.

“저기, 지윤 씨, 수정 원고 보냈다고 그랬지? 편집장님이 메일을 화, 확인하셨을까?”

[그럼요, 벌써 확인하셨던데.]

매트리스에 머리를 박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얼마나 오래 맡으며 죽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소설 속 러브신은 영은의 자기 고백과도 같았다. 그 모든 걸 뻔히 알고서 읽었을 감동해를 생각하니 눈물이 날 만큼 끔찍했다. 첫 경험에 온몸을 떨어대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웃겼을까? 서툰 키스와 섹스를 곱씹으며 얼마나 비웃었을까?

“나쁜 새끼! 하아… 쪽팔려! 죽자, 죽자 하영은.”

**

영은이 쓰던 방 침대에 앉아서 밤새 기다렸지만 아침이 되도록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트렁크도 그대로 있었고 일주일이었지만 그녀가 편하게 사용하던 것들 모두가 제자리에 있었다.

결국 영은의 전화기는 꺼져 버렸다. 동해는 후회하고 있었다, 미치도록 후회스러웠다. 사실대로만 얘기했어도 생기지 않았을 오해였다.

‘집 어디에 구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아니요. 모르는 편이 나을 거예요. 그쪽이 자꾸 받아 주니까 아쉬울 때마다 연락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어디에 집을 구했는지 물어봤어야 했다. 관자놀이를 누르자 전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감동해, 어딨어?”

동한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병원 검진 있었다는 거 잊었어?”

“아….”

과로에 의한 안면 마비 이후 6개월마다 정기 검진을 받아야 했지만 매번 잊어버리는 통에 형 동한이 검진 일정을 챙기고 있었다. 푸석해진 얼굴로 시계를 힐끗거리던 동해가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했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멍한 시선으로 제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동해, 어디 안 좋아? 컨디션이 왜 이래?”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걸치고 거실로 나오는 동해를 보며 동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을 좀 설쳐서 그래.”

“병원 가서 진료 받아 보자.”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도 동해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언젠가 봤음직한 동생의 모습이 동한을 불안하게 했다. 신호등이 정지 신호로 바뀌자 동한이 몸을 외틀어서 동해를 쳐다보았다.

“혹시 지수… 만났어?”

“아니.”

지수를 만난 것도 아닌데 지수를 만났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감동해, 너 연애하냐?”

의심을 하려 들면 이유는 넘치게 많았다. 요즘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동해가 조수석 창을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실내로 밀어들었다. 열린 창에 팔꿈치를 올리고 가만히 턱을 괬다.

“몰라.”

“몰라? 어째 연애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동해가 직진 신호가 바뀌었지만 자신을 보느라 신호를 놓치고 있는 동한을 힐끗 쳐다보며 신호등을 가리키자 차가 다시 출발했다.

“누구야?”

“묻지 마. 아직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니까.”

“기쁘다 감동해. 다시는 연애 못 할 줄 알았더니. 대체 네 속에 있는 냉동 심장을 녹인 여자가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