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서 쪽팔렸던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젠장, 그때 얼굴 안 마주치고 지나갔으면 그대로 끝날 일이지, 뭐 하러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냐고! 그런 일만 아니었음 빙고, 라고 외쳤을 테지만, 빙고는커녕 정말, 정말!'“마담, 절 기억하시죠?”'순간 그녀의 뒤에서 너무나도 감미롭게 흘러드는 목소리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기억하는구나. 그래, 여자의 떨어진 속눈썹 떼어 주는 일이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신이시여, 저는 정녕 연애도, 남자도 없는 인생이란 말입니까!'“마담?”'“아, 예. 이렇게 또 보게 될 줄 몰랐네요.”'정말 진심으로.'“그래요? 전 엄청 반가운데.”'반갑다는 그의 말에 은서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역시, 절대로 잊히지 않는 눈동자다. 뭔가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암회색빛 눈동자. '“이런 귀여운 아가씨를 또 보게 되었으니까요. 근데 이제 보니, 섹시한 아가씨였네요.”'속삭이듯 잦아드는 그의 목소리에 은서의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혔다. 그때, 어느새 우아한 왈츠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고 프레데릭은 한 발자국,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서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한 곡, 쳐주시겠습니까?”'그의 느긋한 시선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치 애무를 하듯, 그녀의 몸을 뜨겁게 스쳐 지나갔다. 정말이지 위험한 남자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금세 홀려들 것처럼. 보기만 해도 단단하고 우아하게 뻗은 몸매에 상대방을 꿰뚫는 듯한 섹시한 눈매와 서늘한 시선. 그리고 목소리는 지나치게 감미로워 듣기만 해도 온몸이 떨려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와 손을 맞잡고서 홀드 자세를 취했다. 물 흐르듯 흐르는 음악 속에 그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그녀를 리드했다. 처음으로 남자 역할이 아닌 여자의 입장에서, 그것도 이렇게 완벽한 남자와 왈츠를 추게 될 줄이야. 아마 이모가 알면 북 치고 장구 치며 플래카드라도 걸지 모른다. 굴 귀신의 백은서, 드디어 남자랑 춤추다! 하지만 그 생각도 금세 사라졌다. 음악에 맞춰 그와 몸이 살짝살짝 와 닿을 때마다, 그의 진한 향기가 그대로 배는 것 같아 낯빛이 뜨거워졌다. 왈츠가 이토록 자극적인 춤이던가? 이처럼 에로틱한 춤이었던가? 그때, 한순간에 다가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차분히 자리를 잡았다.'“아까, 한국어로 몰상식한 여편네라고 했죠? 마담 세뉴르가 알아들었을 리는 없고…….”'그의 뜻밖의 말에 은서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모르게 그의 발을 밟을 뻔했다. 물론, 잽싸게 그가 피했지만…….'“그, 그건 모른 척 해주세요. 솔직히, 너무 열 받아서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에요.”'“뭐, 쌤쌤이라고 치죠.”'귓가에 그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게 울려왔다. 어느새 왈츠는 절정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부드럽게 들려왔다.'“왈츠를 잘 추시는군요.”'“사실 어색하네요. 매번 남자 파트만 춰봤는데.”'하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능숙하게 스텝을 밟고 있었다. 지금껏 많은 여성들과 춤을 추었지만 이렇게 완벽한 왈츠를 추는 여인은 처음이었다.'“왈츠를 좋아하시나 봐요?”'“흠, 왈츠보다는 라틴 계열을 더 좋아해요.”'어느새 음악이 끝나고 은서는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그에게서 떨어지려는 찰나, 음악이 진한 춤곡으로 바뀌더니 그가 단숨에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선 농밀한 어조로 손끝을 움직였다.'“라틴. 정열적이고 섹시한, 게다가 에로틱한 속삭임이죠.”'“…….”'“그러고 보니 이름이?”'“……백은서.”'“백은서, 저는 프레데릭 도베르탱입니다.”'마치 마약처럼 그의 위험스런 목소리가 흘러내렸고, 은서는 제 몸에 와 닿은 그의 손가락에 온몸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그리고 빠르게 쏟아지는 탱고 음악과 빨려 들어갈 듯한 그의 짙은 회색빛 눈동자에 어느새, 그녀는 그의 손길에 따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