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4일. 지하 밀실.' 혜인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창문의 작은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생기 없는 눈으로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민호에게 납치된 지도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함께 몸담았던 연구회 [히스토리아]가 거의 해체될 상황에 이르자, 그녀는 민호와 어떤 담판을 지으려 했었다. ' “대체 그 자식 뭘 보고 처음부터 좋다고 하신 겁니까?”' 민호의 반응은, 그저 뜻밖이었다. 그리고, 얼핏 친절한 듯했던 그는 돌변했었다. 혜인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을 모욕하는 한편, 그녀를 끌고 와서 밀실에 가두기에 이르렀다. 빵과 물로 연명하도록 그녀를 방치하는 한편, 조금씩 양을 줄여나갔다.' 결국, 혜인은 문틈으로 몇 번의 빛을 보던 끝에 탈진해서 쓰러졌다. 민호는 그녀가 저항하지 못하는 것을 틈타, 가끔 밀실에 뛰어들어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농락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면서 눈앞에 무지갯빛 환상이 나타났다. 똑같이 생긴 두 남자가, 각각 다른 시간대에 등장하여 한 여자를 소유하는 모습이 있었다. ' 처음 나타난 남자는, 산천초목을 매번 피로 물들일 만큼 잔혹한 모습이었다. 흑백 명암 이외에는 색을 보지 못하는 아내를 두고, 무자비한 소유욕으로 대했다. 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이면서, 그 자신 이외에는 모든 것이 수탈 대상이었다. 여러 명이 공모한 끝에, 무지개를 등지고, 영주와 쌍둥이처럼 닮은 두 번째 남자가 나타났다. ' 두 번째 남자는, 영주의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온 세상이 흑백으로만 보이는 아내가 꼭 알아볼 수 있도록, 그는 언제나 명암대비가 강한 극채색의 옷을 입고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모자들의 의지대로 선정을 베풀었지만, 그들의 배신과 첫 번째 남자의 귀환으로 그의 삶 또한 끝나가게 되었다. 마지막 순간, 그가 말했었다.' “나는 나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 한때는 금지된 연극이었지만, 2002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서 정식 공연되었던 [더블(Double)]의 한 장면이었다. 둘이었으나 실상은 하나였던 사람, 지금의 민호가 증오해 마지 않는 사람, 그리고 혜인에게 가장 소중한 한 남자는 그 마지막 대사를 매우 좋아했었다. ' ‘여기서 나가야 되는데, 가서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해야 되는데!’'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풍겨왔다. 혜인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는 경첩 옆까지 엉금엉금 기어가서 몸을 바짝 붙인 채, 숨을 삼켰다. 분명 누군가 오고 있었다. '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다시 한 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땠을까. 혜인은 가물가물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어느덧 역사 연구회 [히스토리아]가 처음 결성되던 2001년도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적으로는 대학교 선배이기도 한 초대 마스터, 지금은 자신을 납치하고 감금했지만 한때는 친절했던 민호, 그리고, 단 하나의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