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개와 늑대의 시간. 그 시간이 되면 집에서 나와 언덕을 내려가 허름한 주택가의 오르막길 중턱에 위치한 ‘성운 슈퍼’에 가 막대 사탕 하나를 사서 나온다.

슈퍼 앞 꺼칠꺼칠한 시멘트 턱. 그 위에 앉아 까먹는 200원짜리 막대 사탕. 매일같이 그 슈퍼에 가 막대 사탕을 빨아 먹으며 사람들이 오가는 걸 지켜본다.

어느 요일에 어느 시간대에 어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지 거의 안다. 가끔의 변수를 제외하고는. 매일 비슷한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만 그들의 표정과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기분은 매일 조금씩 다 다르다. 똑같이 매일을 살지만 매일 다른 기분으로 살아가는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나와 비슷한 시간대에 나와 매일같이 캔맥주를 사 간다. 가끔 주전부리를 같이 사갈 때도 있고 어느 날은 담배를 살 때도 있지만 보통은 캔맥주만 사 간다. 그 사람은 캔맥주를 사서 슈퍼를 나오면 슈퍼 앞 한구석으로 가 담배를 피우고는 돌아간다.

그와의 거리는 약 5m 정도 되는 듯하다. 그 간격을 두고 나는 사탕을 빨고, 그는 담배를 피운다. 약 5m 안팎인 거리에서 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본다. 뜨거운 한낮의 여름 같은 시선을 못 느낄 수는 없었을 거다. 그와 눈을 마주친 그 순간.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1>

“콜록, 콜록. 콜록, 캑, 캑.”

송현은 자신의 기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얇은 커튼 천을 뚫고 들어오는 붉은빛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보았다. 졸음이 몰려와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한두 시간은 잔 듯한 몽롱함이다.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을 확인하니 벌써 6시가 다 돼갔다. 송현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컵에 물을 따른 그녀는 식탁에 있는 약 봉투에서 약을 꺼내 물과 함께 입에 넣어 삼키며 창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노을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는 하루에 한 번 정해진 시간 없이 땅거미가 지면 집 밖을 나간다. 더딘 몸으로 언덕길을 내려가는 그녀의 목적지는 성운 슈퍼다.

“안녕하세요.”

“어, 왔어?”

또박또박하면서도 느릿느릿한 말로 슈퍼 주인에게 인사를 건넨 송현이 언제나처럼 막대 사탕을 집어 200원을 내밀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시멘트 턱에 앉은 그녀는 사탕을 까서 입에 쏘옥 넣었다.

‘오늘은 안 오나?’

늘 보는 풍경에도 그녀의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사탕을 반쯤 빨아 먹으니 기다리던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온 한 남자가 슈퍼로 들어갔다. 송현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번졌다. 이름도 모르는 그는 송현의 눈에 들어온 관찰 대상이다.

그를 처음 본 건 약 2주 전이다. 그는 약 2주 전부터 항상 이 시간쯤 슈퍼로 들어가 캔맥주를 사서 밖으로 나와 구석으로 가 담배를 피운다. 여느 때와 같이 송현과 그는 서로 슈퍼의 끝과 끝에 위치해 있다. 송현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낀 그가 송현을 돌아봤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어서인지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슈퍼 주인이 갖다 놓은 재떨이용 화분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숨을 내뱉으며 입 안에 남은 담배 연기를 마저 뿜어냈다.

“저기요. …왜 자꾸 쳐다보세요?”

상냥한 말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썩 기분 나빠 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의 말에 송현의 눈동자가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했다.

“아….”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데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그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송현은 흠칫 몸을 떨며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그는 의아한 마음을 품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송현은 눈만 깜빡이며 생각을 하다 고개를 숙이고는 코와 입을 막은 손을 살짝 떼어냈다.

“이 시간에 여기 오는 거 아저씨랑 저밖에 없어요.”

터무니없는 대답이 돌아와서인지 아니면 아저씨라는 호칭이 거슬린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간에 그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저씨가 제일 눈에 들어와요.”

솔직한 송현의 고백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꾸밈없는 감정 고백이 오히려 궁금증을 해결하려던 그에게 혼란을 안겨 주었다.

*

마룻바닥에 앉은 송현이 가만히 거실 창으로부터 전해지는 아침 햇살을 받아냈다. 옥상에 널어놓은 빨래가 다 말랐을 거라는 걸 깨달은 송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옥상으로 갔다.

마지막 빨래의 빨래집게를 빼는 순간 저 아래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 사람이네?’

슈퍼에서 만날 보는 그 남자. 뭐 하는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순간 들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었을 뿐 진짜로 궁금한 건 아니다. 마지막 빨래까지 걷어낸 송현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 옥상에서 내려왔다.

*

현관문을 열려던 창음의 손이 멈칫했다. 뜬금없던 그 아이, 오늘도 오려나? 그 생각에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그의 손이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긴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창음은 결국 모호한 생각들을 머릿속에 간직한 채 밖으로 나갔다. 근래 슈퍼에서 매일같이 마주친 그 아이와 처음으로 대화했던 어제의 기억이 맴돌았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말에 창음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버렸다. 슈퍼에 가면 만날 그녀가 꺼림칙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단지 신경 쓰일 뿐이다. 그녀가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일까 하는 고민의 틈 사이를 파고드는 그녀의 미소. 얼굴의 반이나 가렸던 손이 떨어지면서 보였던 옅은 미소가 그녀가 했던 말보다 더 신경 쓰였다.

슈퍼에 다다르니 역시나 그녀가 시멘트 턱에 앉아 사탕을 빨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걸음을 멈췄던 창음이 그녀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니 그녀도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두 눈이 마주친 채 서로 눈만 깜빡이다 먼저 피한 건 그녀였다.

창음은 오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티 없이 맑은 눈동자와 마주하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따끔거려 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시선을 애써 피하고는 슈퍼 안으로 들어가 캔맥주를 사서 나왔다. 먼 곳을 바라보는 그녀. 그런 그녀를 흘끔 본 창음이 지정석과 같은 자리로 가 담배를 꺼냈다.

차라리 그때 말을 걸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을 거다. 말을 걸고 상대방의 대답을 듣는 순간부터 관계라는 건 0.1%라도 움직인다. 지금은 1% 정도의 내적 친밀감과 1%의 궁금함이 공존하는 거 같다.

“콜록. 콜록, 콜록.”

멍하니 담배만 피우던 창음은 거친 기침 소리에 송현을 쳐다보았다. 심하게 기침을 하던 그녀는 급기야 숨쉬기를 버거워했다. 얼굴과 목이 새빨개진 송현이 괴롭다는 듯이 심장 부근과 목을 움켜쥐고는 숨을 헐떡이자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던 창음이 피우던 담배를 끄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괜찮아요?”

창음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대답할 여력이 없는지 송현은 괴로워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몸에 힘이 점점 빠져 가는 그녀의 머리가 그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은 송현을 그가 안듯이 받쳤다.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송현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에 넣었다.

창음은 눈에 띄는 그녀의 행동에 집중하느라 구급차를 부르려고 꺼낸 핸드폰을 송현이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조금 있으니 괜찮아진 건지 거칠었던 그녀의 호흡이 안정되어 갔다. 위급 상황을 넘긴 안도감에 창음의 힘이 탁 풀렸다.

악령이 나타나 혼이라도 빼앗아 가기라도 한 듯 머리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멍한 창음의 얼굴 위로 노을빛이 쏟아져 내렸다. 노을에 먼눈을 똑바로 뜨니 노을 진 하늘이 눈에 들어오면서 탁했던 눈이 초점을 잡았다.

창음은 그제야 자신이 땅바닥에 앉아 그녀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굽어진 다리 사이에 안기듯 기댄 그녀의 얕은 숨이 그의 심장 부근을 간지럽혔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위험에 처했던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가만히 있었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쌕쌕 숨을 내쉬는 송현이 그의 어깨 부근에 기대었던 머리를 떼어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열이 오른 건지 두 볼이 발그레한 그녀가 창음을 올려다보았다.

“아… 감사합니다.”

기침을 하도 하더니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의 품에서 느릿한 몸으로 빠져나온 송현이 시멘트 턱에 앉았다. 진정은 되었으나 여전히 힘겨워 보였다.

“병원 안 가도 되겠어요?”

“괜찮아요. 금방 나아요.”

송현은 더는 폐 끼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웃는 듯 마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항상 보던 언덕 아래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 송현을 유심히 보던 창음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멘트 바닥에 앉아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던지듯 놓고 왔던 캔맥주가 담긴 봉지를 집어 들고 송현에게로 갔다. 송현의 앞에 쭈그려 앉은 창음이 그녀에게 캔맥주 하나를 내밀었다.

“얼굴 빨개요. 볼에 대고 있어요.”

어떤 연민에서 나온 호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그러고 싶었다.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져서인지 자꾸만 시선과 마음이 끌렸다.

“…감사합니다.”

창음이 건넨 캔맥주를 받아 든 송현이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레 볼에 가져다 댔다. 다른 부분들을 다 열이 식었는데 양 볼만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창음이 아예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위급했던 그 한순간만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온 정신이 팔리기에는 충분했다. 이렇게 앳된 얼굴이 그런 위험한 상황을 겪고, 별일 없었다는 듯이 다른 곳을 보는 게 굉장히 신경 쓰였다.

“몇 살이에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녀가 당황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지도 않는 남자가 던지는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구름까지 물들여 버린 붉은 노을이 그와 그녀를 향해 내리쬐었다. 그녀는 밝고 귀여운 미소와 함께 손으로 브이 자를 그려 보였다.

“투투. 스물두 살이에요.”

새벽에서야 그친 비를 다 말리지 못한 강렬한 햇살이 남긴 오묘한 온도와 습도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 그들은 그렇게 얼렁뚱땅 아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때때로 어떤 상황을 돌이켜 볼 때, 내가 생각했던 게 다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되지. 아름다운 소녀가 네 인생에 걸어 들어왔지. 넌 사랑에 빠졌지. 아니, 그랬나? 아마도 그건 유치한 사랑의 열병이었거나 덧없는 한순간일 뿐이었겠지.』 -헨리 브로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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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푸르던 잎사귀들도 어느덧 색이 변해 가고 있다. 하드 아이스크림 하나를 입에 문 창음이 나무에 매달린 얼룩덜룩한 나뭇잎들을 바라봤다.

“뭐예요? 아저씨가 집까지 다 찾아오고?”

송현이 밝은 웃음으로 대문을 열고 나왔다.

“이거.”

창음은 성운 슈퍼에서 산 아이스크림들을 송현에게 건넸다. 봉지 안을 확인한 그녀가 입을 쩍 벌리는 리액션을 보였다.

“오. 웬일이래. 들어와요. 같이 먹고 가.”

“됐어.”

“할 일도 없으면서 사양은. 빨리 들어와요.”

그렇게 말하고는 들어가 버리니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창음도 어느새 그녀의 집 대문 안으로 발을 들이고 있었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은 송현이 봉지 안을 뒤적거리더니 쭈쭈바 하나를 골랐다.

“일로 와요. 여기 앉아.”

창음은 쭈뼛거리며 평상 위에 앉아 아이스크림 꼭지를 따려고 낑낑거리는 송현을 대신해 아이스크림 꼭지를 따 건네주고는 꼭지는 자신의 입으로 넣었다.

“아, 진짜. 그걸 뺏어 먹냐.”

“이거 내가 사 왔거든.”

“아저씨 거 먹으면 되잖아요.”

“먹던 거 다 먹었어.”

창음이 깔끔한 하드 막대기를 보이자 그런 그가 얄미운 송현이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