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아 그린우드가 이제 많이 좋아졌나 봅니다. 열심히 검술 대련을 한다고 하더군요. 하여튼 대단한 녀석이 아닙니까?”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기사 단장 라르손이 내뱉은 소리였다.

유리우스는 아직 뼈가 완전히 붙지 않아서 움직일 때 조금씩 인상을 쓰던 노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반은 접고 생각해도 검술 대련은 노아의 상태론 무리였다.

유리우스가 속내를 감춘 채 무심하게 툭 말을 던졌다.

“잘못 본 거 아니야? 아직 검을 쓸 상태가 아닌데.”

“제프리 녀석이 그러더라고요. 노아와 로빈이 검술 대련을 하더라고….”

“확실해?”

“설마 제프리 녀석이 제 동기도 못 알아보고 헛소리를 했겠습니까? 분명히 봤으니 와서 그런 소리를 했겠죠.”

사실을 확인하는 유리우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순간 드는 생각은 이 녀석 또 고집대로 벌써 움직였구나 하는 걱정이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일렀거늘….”

문득 노아의 수에 말려 허락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검을 다시 잡으려 자신의 허락을 맡은 거였다.

좀 더 신중하게 대답했어야 했구나 하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그녀가 다시 아파하는 것을 그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모르셨군요. 그 녀석이 마음이 급해서 몸이 앞서나 봅니다. 절대로 무리하면 안 될 텐데…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셔야겠습니다.”

“그러지.”

고집불통 같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아픈 몸을 이끌고 검술훈련을 한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참으로 노아다웠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구나.

어쩐지 요즘 얌전히 말을 잘 듣더라니. 뒤에서 몰래 검술 대련을 하고 있었군.

기사 단장도 아는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전해 듣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는 에메랄드 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우스는 노아가 머무는 예비 왕세자비의 방에 노크했다.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다채로운 표정의 노아가 빼꼼 문을 열어주었다.

유리우스가 성큼 방안으로 들어왔다. 대낮에 나타나는 것은 전혀 왕세자답지 않은 행보이기에 노아는 눈만 껌뻑거리며 그의 모습을 쫓았다.

유리우스가 소파에 주인처럼 앉으며 그녀를 보고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손짓만 했을 뿐인데 기가 죽는 건 무슨 경우지. 타고난 기품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그의 발걸음에 노아의 숨소리가 저절로 음 소거가 되었다.

왕세자의 분위기가 진지한 것이 느낌이 싸했다. 무리한 대련에 온몸이 쑤시고 컨디션이 바닥이었던지라 노아는 조용히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계속 무리해서 훈련한 것이 들키기라도 한 것일까. 궁금하고 답답한 속내를 알아내는 은근한 방법을 알지 못하니 그녀는 그저 솔직하게 질문했다.

“주군. 무슨 일이십니까?”

“그래. 내가 네 주군이 맞긴 한가?”

“당연히 제 주군이시죠…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심기가 불편하신 것 같은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훈련 언제부터 시작했어?”

아무튼 궁에 있는 놈 중에 믿을 놈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계속 느끼고는 있었다.

역시 내 촉은… 어떤 새끼가 그새 일러바친 거야? 기사 단장 라르손이 말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른 채 노아가 속으로 입 싼 자식에게 욕을 했다.

“일주일 됐습니다.”

“일주일이나 됐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군. 무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조심했습니다.”

“그 거짓말이 진짜냐? 얼마나 어떻게 했는데?”

“제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일일이 주군께 보고해야 합니까? 그건 너무 과잉보호가 아닙니까? 누가 보면 다 죽어가는 환자인 줄 알겠습니다.”

“말이 많군.”

“어깨가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대련했습니다.”

“…확실한가?”

유리우스가 실눈을 뜨며 진위 여부를 파악하려는 듯이 노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뚫어질 것처럼 자신을 살피는 시선을 받고 있자니 여지없이 가슴께가 찌릿거렸다.

노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유리우스의 시선을 받아냈다.

“아니… 저 호위 기사입니다. 빨리 나으려고 검을 잡은 것 가지고 이렇게 잡도리하실 겁니까? 쪼잔하게?”

“쪼잔하게? 너는 지금 너의 안위를 걱정하는 내가 쪼잔해 보이나?”

“그, 그렇지 않습니까? 아파서 많이 하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빨리 나아서 주군께 도움이 되고자 연습 좀 한 것 가지고 도끼눈을 뜨시며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몰아붙이시는데… 이게 쪼잔한 게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유리우스가 졸지에 쪼잔한 사내가 되어버렸고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다.

“날 이렇게 막 대하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다. 노아 그린우드. 나는 왕이 될 사람이다.”

“그러면 쪼잔한 왕이 되시겠네요. 여자 아니고 기사입니다. 주군께서 아무리 말리셔도 이제는 무리해서라도 열심히 검을 잡을 겁니다. 사냥제도 다가오고 여러모로 실력 있는 호위 기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국입니다. 제발 마음 편히 검을 잡게 해주세요.”

“그날은 넌 기사가 아니라 내 파트너로 갈 거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검을 잘 쓰고 주군을 보호하는 레이디 기사로 참석할 겁니다. 그러니 말리지 마십시오.”

“말리면 듣긴 하고?”

“그럼 뭐, 호위 기사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이번에는 단연코 호위가 아니다. 나머지 숙녀들처럼 막사 안에 머물러 있어. 우리의 계획대로 남들 눈에 사이좋은 연인인 척하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멋지게 해내겠습니다. 왕세자의 막사와 인근 주변의 습격은 제가 다 커버하겠습니다. 주군은 마물에 집중하십시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하지만 장담할 순 없겠지. 그동안 경험으로 보면 수많은 변수가 있었으니.”

베로니카라면 음식에 독을 넣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막사는 제가 사수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물론 예쁜 드레스 입고 말입니다.”

노아가 드레스를 입을 생각에 심란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사벨라가 알아서 도와줄 거다. 넌 얌전히 대기하고 있어.”

예예, 어련하시겠어요. 일평생 얌전히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노아는 속이 상해서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

키르탄 왕궁은 매년 봄이 만개하는 5월에 연례행사로서 사냥 대회를 개최했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오렌지 산은 사냥제를 개최하는 장소로 산세가 울창하고 자원이 풍부했다.

오렌지 산의 번영은 키르탄 왕궁의 번영을 상징했다. 키르탄 왕들이 후계자들을 혹독하게 수련을 시키며 담력을 키웠던 곳도 바로 이 오렌지 산이었다.

산에는 총 10개의 산장이 있었고 산지기와 사냥꾼이 상주했다. 그들은 일 년 내내 오렌지 산의 하급 마물을 사냥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수도 호크만을 지켰다.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급 마물들은 500년 전에 멸종했으며 하급 마물만 생존했다. 오렌지 산의 생태계 균형을 위해 사냥대회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원체 자원이 풍부하고 산이 울창해서 하급 마물들은 해마다 개체 수를 불렸다.

오렌지 산의 하급 마물의 개체 수를 조절하는 것이 사냥대회의 주된 목표였다.

매년 행하는 연례 행사이다 보니 해마다 참가자가 늘었고 사냥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귀족이나 기사들에게는 큰 포상이 주어졌다.

게다가 잘만 하면 나라에서 요직을 차지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귀족과 평민에게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사냥 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지며 우승은 가문의 영광을 의미했다.

올해도 앞 다투어 너도 나도 참가를 희망했다. 왕실 기사단이 특히 분주해지는 시기도 바로 이 시기였다.

왕실 기사단원이라면 모두 의무적으로 참석을 해야 했지만 발생할 사고를 대비하는 곳도 바로 왕실 기사단이 할 일이었다.

하지만 왕세자에게는 또 다른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냥 대회는 위험했다.

왕비는 사냥 대회 때 유리우스의 목숨을 노렸지만 전부 불발에 그쳤다.

레온 왕의 건강이 악화된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암살자들을 보냈으니 필히 왕비는 사냥 대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기사단실에서 기사 단장이 우려를 표현했다.

“이번에도 무턱 대고 당하실 겁니까?”

“당하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내 반드시 올해는 왕비의 목줄을 움켜쥐고 폐위를 할 것이다.”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그래서 더 이가 갈린다.”

왕비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아바마마를 생각해야 했다.

최소한의 자비를 베푸는 일은 그 여자를 폐위해서 냉궁에 가두는 것이다.

“주군. 불씨를 남겨 놓으면 위험합니다. 암살자를 죽이는 것이 맞습니다.”

라르손이 강력하게 암살자들을 죽일 것을 제안했다.

“우두머리는 살린다.”

하지만 유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재판에 이겨야 왕비를 폐위시킬 수 있었다. 

최대한 많은 증거와 증인. 여러 변수가 필요했다. 그러니 우두머리는 살리는 것이 현명했다.

“언제나처럼 주군 뜻대로 하십시오. 목숨 걸고 싸우겠습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마음껏 활개를 치게 놔둬야지. 오랫동안 참고 숨죽여왔다.

원 없이 짓밟혀왔다. 참은 것은 힘을 기르고 기회를 노리고 증거를 모으기 위함이었다.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이를 악무는 총사령관의 다짐에 기사단실에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사냥제를 시작하는 당일 날이 되었다.

아침에 베로니카 왕비가 다시 한번 만전을 기하기 위해 카르멘을 불렀다.

지난 10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유리우스를 죽이기 위해 갖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지독한 놈 머리카락 하나 날릴 수가 없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베로니카의 가슴을 하얗게 태웠다.

전부 다 무능하고 형편없는 것들밖에 없는 것인가. 그동안 던져준 황금으로 오렌지 산을 한바퀴 돌고도 남겠구나. 한심한 것들!!

이제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미적거리다가 레온 왕이 유리우스에게 선위라도 하는 날에는 그동안 쌓아왔던 공든 탑이 다 무너져 버린다.

선위는 가장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후계자를 지정하는 방법이었고 귀족들 대다수가 순리로 받아들이는 왕위 후계자 양도 방법이었다.

선위가 반포되면 선위를 뒤집는 모든 행위는 그때부터 반역으로 간주가 될 것이다.

그러면 왕비와 타이젠을 지지했던 왕비파의 절반은 겁을 먹고 등을 돌릴 것이다.

선위가 반포된 날부터 선위를 반대하는 모든 행위는 반역으로 간주된다. 그렇게 되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기면 왕좌를 움켜쥐지만 지게 되면 목이 잘려 중앙 광장에 걸릴 것이다.

가장 피하고 싶은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러니 제일 쉬운 방법은 라이벌이 사라지는 것. 즉, 유리우스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사냥제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한다. 알겠느냐?”

아침부터 찾아온 두통이 도통 개지를 않으니 짜증이 더 났다. 왕비는 관자놀이를 신경질적으로 누르며 호통을 쳤다. 무릎 꿇은 카르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예, 왕비마마. 이번에는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전문적인 살수를 고용한 것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이웃 나라 발로스에서 넘어온 자들입니다. 이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들이니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사건이 커져서 이목이 쏠리는 것은 원치 않으니 왕세자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라고 해. 절대로 증거를 남겨서는 안 돼. 내가 사주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안 된단 말이다. 들켰을 땐 무조건 발로스의 짓이다. 알겠느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왕세자를 죽이기만 해라. 돈을 아끼지 말고 줘. 달라는 대로 주란 말이야.”

“네. 왕비마마.”

카르멘이 떠나고 베로니카가 두통에 잘 듣는 차를 마셨다. 요즘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시도 때도 없이 두통이 나면 가라앉지 않았다.

나도 나이를 먹는구나. 이제 이 싸움도 마지막이다. 너무 길었다. 유리우스. 나를 위해 죽어다오. 베로니카가 두 주먹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오렌지 산이 원체 높고 험준한 산세이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나도 살아남기가 힘들 것이다.

참가자가 많다 보니 그중에 누가 사주를 받은 암살자인지 알 수도 없겠지.

목숨 줄 질긴 유리우스. 이번 사냥터가 네 무덤이 될 것이다. 베로니카가 무시무시한 미소를 지었다.

***

새벽부터 이사벨라가 하녀 두 명을 데리고 노아를 깨우러 왔다. 노아는 아침부터 이사벨라의 인형이 될 예정이었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아가씨?”

“누구야? 무슨 일이지?”

꿈결에 노아는 그 소리를 들었다. 아가씨? 난 아가씨가 아닌데… 누가 내 몸을 흔드는지 자각을 하자마자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사벨라가 비장한 표정과 목소리로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욕실로 가시죠. 아가씨.”

“아, 맞아. 사냥제.”

“네. 맞습니다. 사냥제. 이제 사냥제 준비를 하셔야지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이사벨라는 마치 인형 놀이를 하는 것처럼 신이 나서 노아를 씻기라고 하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두 명의 하녀들에게 거의 연행되다시피 노아는 질질 욕실로 끌려갔다.

하녀들은 그녀를 따뜻한 욕조에 집어넣고 입욕제를 푼 다음 사정없이 때를 벗기고 마사지를 한 후 향유를 온몸에 골고루 발라주었다.

잠이 싹 달아나서 이사벨라에게 따지려 했지만 이사벨라가 노아의 입을 막았다.

“쉿, 아가씨. 오늘은 얌전히 계셔야 합니다. 반항은 사절합니다.”

이사벨라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한 소리 들을 것 같아 그녀는 침묵했다.

깨끗이 씻겨져 목욕 가운을 입혀진 채 화장대 앞에 앉자 이사벨라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살살 해주세요.”

“꿈도 꾸지 마세요, 아가씨. 무려 왕세자님의 파트너세요. 살살은 무슨?”

노아 그린우드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한숨 더 자야지….

거의 세 시간의 마법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놀랍게도 사내였던 노아 그린우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름다운 레이디 노라 매디슨이 앉아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맨날 기사복만 입고 있으니. 쯧쯧. 몽땅 갖다 버리고 싶답니다.”

“참아요. 이사벨라. 나 욕 잘합니다.”

“욕 얻어먹으면 오래 산대요. 어느 날 갑자기 옷장에 드레스만 있어도 놀라지 마세요.”

이사벨라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노라를 협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