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_만다라

움직일 때마다 맑은 구슬 소리가 나는 멋스러운 입영이 달린 흑립을 쓰고 옥색 철릭을 입은 이수가 시전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상단이 아닌 집으로 왔다. 존재조차 잊고 있던 몇 개의 만다라를 기억해 내고 그것들을 챙기러 왔던 것이다.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는 그것들을 여기저기 뒤져서 책방 구석 서책들 사이에서 마침내 찾아내고 다시 상단으로 향했다.

이수는 집에서 상단으로 가는 멀지 않은 이 길이 좋았다. 그리 번잡하지 않았고 옹기종기 모인 집들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위로를 얻었다. 낮은 담벼락 너머 보이는 풍경으로 행여나 굶주린 사람은 없는지, 아프지만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지 표시 내지 않고 둘러볼 수 있어 좋았고 때로는 막동을 통해 사정을 듣고 도움을 주기도 했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풍성한 버드나무 아래를 지날 때 낮은 싸리문이 열린 틈에서 뛰어나오는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곧이어 뒤따라 나온 아낙이 아이를 냉큼 안아 올리고 간지럼을 태우다가 이수를 발견하고 반색을 했다.

“아이고, 대행수 어른이 아니십니까?”

“여식은 이제 괜찮은 것이냐?”

“예예, 대행수 어른께서 의원을 보내주셔서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앙증맞은 여자아이가 엄마의 손길이 간지러운지 까르르 웃자 이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예쁜 아이구나, 잘 보살피도록 하여라.”

“예, 예 대행수 어른. 고맙습니다!”

허리를 굽실대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아낙과 엄마를 따라 함께 고개를 까딱이는 아이가 아낙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다시금 뒤를 돌아보고 걷는 대행수를 막동이 환한 웃음을 머금고 바라보았다.

“대행수님이 아니셨다면 열 때문에 지금쯤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아이입니다.”

“그것은 모를 일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이치더냐.”

“누구에게는 복잡할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수가 막동을 힐끗 돌아보았다.

“해당 되는 상대가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것이… 언년이를 찔렀다던 여자의 시신을 새벽에 착호갑사가 삼각산에서 발견해서 수습해 왔다 합니다.”

걸음을 멈추자 흔들리는 입영처럼 막동을 보는 이수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착호갑사가? 호랑이에게 변을 당한 것이냐?”

“예, 걸친 옷가지와 팔 하나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누구라더냐?”

“사람들 말로는 자온 행수의 작은 부인이라 합니다. 기억하시지요? 언년이를 멍석말이하던 여인 말입니다.”

이수의 기억 속에 남은 그 여인은 유난히 표독스러운 목소리와 화려한 옷차림새뿐이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온 행수가 언년이를 첩으로 만들려고 공을 들였는데 작은 부인 때문에 일이 틀어졌다며 결국 여자를 내쫓았다 합니다.”

“그래서 작은 부인이 연이에게 분풀이를 했고?”

“예, 그리고 연이가 다친 것을 알게 된 자온 행수가 작은부인에게 분풀이를 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수군댔습니다.”

자온 행수… 연이에 대한 마음이 탐욕이냐 아니면 연심이냐.

“한데 착호갑사들 말에 의하면 현장에 혈이 많지 않았고 잘린 팔을 봤을 때 이미 죽은 상태로 호랑이에게 던져진 듯싶다 합니다.”

남에게 나쁜 짓을 할 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연이는 말했었다. 과연 그 말이 사실일까?

“앞으로 연이가 위험할 수 있으니 자온 행수를 경계하도록….”

골목으로 들어서는 이수를 향해 날카로운 칼날이 날 선 소리를 내며 날아들자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혀 피했다.

“백주에 웬 놈들이냐!”

막동이 칼로써 칼날을 걷어내고 소리쳐 봤지만 아무런 대답 없이 복면을 쓴 남자들이 다시 덤볐다. 이수를 막아선 막동이 장도를 휘두르는 두 사람의 공격을 재빠르게 막아내자 쇠와 쇠가 부딪치며 불꽃을 만들어냈다.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던 복면 쓴 자가 시퍼렇게 날이 선 장도를 휘두르며 이수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챈 이수가 날쌘 몸놀림으로 한 걸음 물러나 도움닫기 하며 몸을 돌리자 철릭이 공기를 품어 둥글게 부풀어 올랐고 그 사이로 보이는 긴 다리가 남자의 가슴을 힘껏 걷어찼다.

복면을 한 남자가 칼과 함께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셋의 시선이 빠르게 교차하더니 순식간에 떨어진 칼을 쥐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쫓아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막동은 보이지 않았다.

‘반드시 조현익을 조심해야 합니다.’

중전에게서 주의를 들은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역시 조현익인가?

죽이고자 했다면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저들의 목적이 공격보다는 위협일 거라는 생각에 이수는 점점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불안감으로 목이 탔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자신의 시선을 피하던 연이의 눈빛과 갑작스러운 눈물이 생각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것을 본 것이냐… 그래서 내게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이냐.’

걸음을 재촉하던 이수가 상단에 다다랐을 때 솟을대문 앞에서 자온과 함께 있던 연이를 발견하고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연이야!”

“대행수님? 왜 이제 오세요?”

자신을 향해 해사한 미소로 발랄하게 달려오는 연이를 보자 목덜미를 간질이는 통증에 어깨가 움찔거렸다.

“넘어진다, 뛰지 말거라.”

“대행수님을 제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아세…요!”

뛰어오던 연이가 우뚝 멈춰 서며 눈동자가 빠질 만큼 커진 눈으로 이수를 바라보았다.

“대, 대행수님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다, 왜 그러느냐 연이야?”

연이가 떨리는 손을 뻗어 이수의 팔을 잡고 철릭 소매를 걷어 올리자 빨간 피가 고인 상처가 드러났다. 조금 전에 복면 남자의 칼을 피하면서 얕게 베인 듯싶었다.

“괜찮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어디서요? 왜요? 왜 다치셨는데요?”

“나는 괜찮다. 들어가자.”

**

연이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집무실에서 이수의 상처에 약재를 바르며 잔뜩 인상을 썼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겠어요. 내가 아플 때 대행수님도 이런 마음이었어요?”

새하얀 명주 천으로 상처를 동여매는 연이의 부드러운 손길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바라보던 이수가 가볍게 대꾸했다.

“이제라도 알았다니 다행인 듯싶구나.”

연이의 커다란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이야, 이 정도로 죽지는 않는다.”

찰싹!

소매를 걷어 올린 이수의 팔을 연이가 얄밉다는 듯 세게 때렸다.

“아! 연이 너!”

“왜요? 왕이 되실 분인데 함부로 몸에 손을 댔으니 벌이라도 주시게요?”

무심하게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낸 연이가 쌜쭉한 표정으로 당황한 이수를 째려보았다.

“얘기해 보세요, 왜 다쳤는지.”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

연이의 손을 잡고 당기자 이수의 긴 다리 사이에 놓인 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는 어째서 겁도 없이 자온과 함께 있었던 것이냐?”

“그냥 핫감자가 왔기에 얘기만 한 건데.”

“무슨 얘기?”

“아침에 본 여자에 대해서 물어봤어요.”

답이 궁금한지 이수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자기가 그런 게 아니래요. 그리고 제가 아는 핫감자도 그럴 수 있는 위인이 못 돼요. 사랑이라고는 받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이랑 행동이 좀 재수 없긴 해도 누군가를 해코지할 만큼 독하진 못하거든요.”

“저쪽 세계에선 그럴지 모르겠으나 여기선 그렇지 않다.”

“예에?”

“그러니 조심하여라!”

“서, 설마 핫감자를 의심하는 거예요?”

이수의 상처를 바라보며 연이가 물었다.

“아직은 모른다. 섣불리 단정 짓지도 말고 섣불리 믿지도 말라는 것이다. 알겠느냐!”

“예? 예….”

과거와 미래의 인물이 같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믿음이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기다린 연유는 무엇이냐?”

멍한 시선으로 생각에 잠긴 연이를 다정한 목소리가 일깨웠다.

“아… 사과하고 싶어서요.”

“무엇을?”

“우선 대행수님의 상황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하지 못했다는 것과 저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대행수님이 곤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에 대해서요.”

일어나서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죄송해요, 대행수님. 왕이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일 수 있는 일인지 생각하지 못했어요.”

불현듯 이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난 왕이 될 생각이 없다.”

“예에? 그게 가능해요? 여긴 조선인데?”

동그란 눈으로 자신에게 질문하는 연이의 시선을 이수는 애써 외면했다.

“설마 대행수님 만다라 찾지 않으시려는 거예요?”

정곡을 찌르는 연이의 질문에 이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니 찾을 것이다, 진실이 다를 수도 있으니 찾아야겠지. 하지만 같은 진실이라면 찾지 못했다 할 것이다.”

“왜요? 왕이면 대행수님이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을 텐데?”

“난 다 하면서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지금처럼… 마음 편히 살고자 한다.”

너와 함께 그리 살고 싶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해 다만 뜨겁게 바라볼 뿐이었다.

“왜, 왜요…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건데… 요?”

이처럼 근사하고 담백하게 유혹할 수 있는 남자가 과연 현실에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쿵쿵쿵.

연이는 심장 소리 때문에 귀가 먹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행수가 들을까 마음이 불안해졌다.

“내가 너를 어찌 보느냐?”

연이 앞으로 이수가 한 뼘 몸을 기울이자 그의 숨결이 연이의 피부에 닿았다.

“저기… 엄청 느끼해요. 버터 그러니까 콩기름을 한 그릇 마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뭐.”

“훗… 그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예…?”

“나는 너를….”

“호, 혹시 꼬시려는 거예요?”

“훗. 꼬신다… 그래, 내가 너를 꼬시려 한다.”

다시 한 뼘 다가오자 연이의 온몸 말초 신경들이 동시에 경기를 일으켰다.

“그거 아세요? 대행수님이 얼마나 위험하고 치명적인 남자인지….”

연이가 두 손을 뻗어 이수의 뺨을 감싸 쥐고 뜨거운 숨결을 뱉어내는 남자의 입술에 자석처럼 입술을 부딪쳤다. 그리고 간절함으로 바라보는 눈동자….

“넘어가 줄게요.”

꽉 잠겨 속삭이듯 말하는 연이의 목소리가 이수를 더욱 자극했다.

꿀꺽.

긴장한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고 남자의 목울대가 사냥의 타이밍을 알려 주듯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굶주린 맹수가 사슴을 공격하듯 이수의 너른 품속에 연이를 뜨겁게 안고 연한 입술을 덮치자 살기를 포기한 사슴처럼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며 감겼다.

고급스러운 남자도 어쩔 수 없는 수컷임을 보여주려는 듯 강하게 더 강하게 연이의 입술을 탐하고 탐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격정에 연이는 숨을 쉴 수가 없어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삐!

연이의 귓전을 때리는 날카로운 기계음에 감은 눈을 더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임연이 씨! 임연이 씨!”

“의식이 없습니다!”

또!

정신없는 중환자실의 모습이 스냅 샷처럼 번쩍이며 흘러갔다.

‘어째서 자꾸 병원 모습이 보이는 거지? 헙!’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을 때 온몸이 새우처럼 휘었다 펴지며 눈앞이 새하얘진다.

“연이야! 연이야!”

꿈결처럼 아스라이 들리던 이수의 목소리가 점차 현실임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