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전동킥보드를 발렛파킹 맡기는 그녀.

“아직 치료중인 환자를 이런 식으로 나가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사정은 알겠는데… 병원이 자선단체는 아니잖아”

“누가 안 준대요? 한주만 더 기다려 달라는 거잖아요.”

“두 달 전에도 같은 말 했던 거 기억하지?”

“…그… 그건….”

나아질 것이 없는 삶이었다. 원무과 대머리 조 과장은 여전히 깐깐했고, 새벽 뺑소니차에 치인 엄마의 의식은 여전히 정전상태였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을 휴학하고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하고 있는 그녀의 삶은 최악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조 과장의 관심은 지현의 풍만한 젖가슴과 엉덩이에 꽂혀있었다.

“어떻게든 다음 주까지는 마련해볼게요.”

“어떻게?”

비릿한 입맛을 다시며 그가 노골적으로 지현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얇은 면바지 아래가 불룩 솟아올라 있었지만 그는 보란 듯이 물건을 세웠다.

“알바해서 그 큰돈을 언제 갚으려고.”

“…한주만 더 기다려 주세요. 어떻게든 마련할게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데… 쉽게 돈 버는 알바를 해야지.”

“…!”

“대학도 휴학했다며?”

사람의 왕래가 없는 비상구 계단이었다. 불룩 솟아오른 물건을 앞세워 그가 지현에게로 한걸음 전진했다. 그녀는 슬쩍 몸을 피해 비상구 문 앞에 섰다.

“한주만! 한주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리 와봐… 진지하게 얘기 좀 하자고.”

그녀는 다급하게 비상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병원 로비를 달려 중환자실까지 달려가는 동안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창 안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잠들어있는 그녀의 어머니가 보였다. 그녀는 아련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조금만 참아… 내가 꼭 엄마 살려낼 거니까… 나 믿고 조금만 더 힘내줘….”

-지이잉. 주룩 흘러버린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20000원 / 평창동] 수락 / 거절

그녀는 다급하게 수락버튼을 누르고 애써 밝은 얼굴로 유리벽 너머의 엄마를 바라봤다.

“갔다 올게… 좋은 꿈 꿔 엄마.”

지현은 도로 갓길에서 꽤 빠른 속도로 전동킥보드를 몰았다. 머리통보다 큰 헬멧이 덜그럭거리며 자꾸만 눈을 가려왔다.

-빠앙.

자동차들의 경적소리가 수시로 위협해 왔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전동킥보드를 몰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일식당 앞에서 멈춘 그녀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대리운전 부르셨죠? 지금 식당 주차장에 도착했거든요… 어디 계세요?”

[아… 벌써요?]

“…제가 너무 빨리 왔나요?”

[…어쩌죠. 아직 자리가 끝나질 않았는데.]

“혹시 얼마나 걸리세요?”

[10분 정도?]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죄송해서 어쩌죠?]

“아니에요, 식사 마치고 나오세요.”

그녀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꽤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밤 시간대의 대리운전은 만취한 남성들을 상대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짧은 한숨을 쉬더니 의외의 말을 건네 왔다.

[혹시 식사했어요?]

“네? 저요?”

[아직 안 했으면 들어올래요?]

“네?”

지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식당의 거대한 간판을 올려다봤다. 큰 부자가 되면 꼭 한번은 와보고 싶었던 유명한 일식당이었다.

[기사님? 듣고 있어요?]

“…네? 아… 네….”

[들어오세요, 8번방이에요.]

“저… 저기요… 저는 그냥 여기서….”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압도적으로 화려한 일식당의 간판을 다시 한 번 올려다봤다.

그녀는 전동킥보드를 낑낑대며 들고 일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하게 수놓인 일본풍의 인테리어와 홀 중앙을 차지한 거대한 연못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장차림의 식당 매니저가 다가와서 그녀를 경계하듯 바라봤다.

“어떻게 오셨어요?”

“저… 저기….”

“저희 음식점은 예약제입니다, 알고 오셨나요?”

“그… 그게 아니라….”

“예약이 안 되어있다면 나가주셔야겠습니다.”

“8번방! 8번방이요.”

매니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현을 바라봤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냈다.

“8번방으로 안내해주세요.”

어느새 모여든 직원들이 그녀를 원숭이 구경하듯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전동킥보드를 매니저에게 건넸다.

“주차 좀 부탁해도 될까요?”

“네? 아… 알겠습니다.”

매니저는 갸우뚱거리며, 그녀의 전동킥보드를 발렛파킹 직원에게 넘겼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매니저는 연못을 지나쳐 소담한 정원을 지나 8번방 앞에서 멈췄다. 매니저를 따라가는 동안,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해야만 했다. 매니저는 8번방을 노크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매력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들여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이사님? 분명 목소리는 젊은 남자였는데?’

매니저는 고풍스러운 문양으로 수놓인 문을 양쪽으로 열었다.

‘내가 미쳤지…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지금이라도 나갈까?’

심장이 요동치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심정으로 그녀는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8번방 안에는 중후한 재력가로 보이는 노신사와 젊고 잘생긴 슈트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지현을 발견하곤 생긋- 웃는 얼굴로 일어섰다. 180은 훌쩍 넘어 보이는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조각처럼 빛나는 얼굴이었다.

“기사님?”

“….”

전화기로 듣는 것보다 눈앞에서 듣는 목소리가 훨씬 매력적인 남자였다. 넋이 나간 얼굴로 굳어있는 지현의 얼굴 앞으로 남자가 얼굴을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네? 아… 네… 괜찮아요.”

남자는 의자를 빼주며 지현을 향해 또 한 번 싱긋- 웃어주었다. 사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은 미소였다.

“감사합니다.”

지현은 남자가 빼준 의자로 다가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앉았다. 잡지책에서나 보던 산해진미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꼴깍-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까 봐 지현은 목구멍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남자는 옆자리에 앉은 지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머리에….”

“네? 제 머리가… 왜요?”

지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머리를 만져보았다. 그리고 두 손에 느껴지는 이 감촉은… 헬멧이었다! 냉큼 헬멧을 벗어버렸지만 얼굴은 달아올라 순식간에 귀까지 빨개져 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지현 앞으로 음식들을 옮겨주었다.

“드세요, 이 집 음식 괜찮아요.”

“…저… 회를 못 먹어서요….”

‘못 먹긴 뭘 못 먹어, 회 귀신인데… 근데 내가 지금 회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고.’

지현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노신사가 마침내 술잔을 내려놓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장 의원하고는 이미 이야기 다 끝났다.”

“원점으로 돌리지 마세요, 전 이미 ‘NO’ 라고 말씀드렸어요.”

“장 의원 딸이 어디가 부족하냐? 인물, 학벌, 집안…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아이야.”

“전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약혼부터 하라는 거 아냐! 할애비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말 들어.”

낮은 음성이었지만 노신사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있었다. 남자는 갑자기 지현의 헬멧을 손에 들고 일어섰다.

“기사님 늦었죠? 이제 그만 갈까요?”

“네? 아… 네….”

지현은 서두르는 남자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신사는 남자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봤다.

“언제까지 운전기사도 없이 다닐 생각이냐?”

“불편해요, 술 마신 날은 오늘처럼 대리운전 부르면 되고….”

“기업 총수면 총수답게 행동해. 너는 곧 기업의 얼굴이야!”

“오늘 잘 먹었습니다, 할아버지.”

남자는 노신사의 말을 끊으며,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황급하게 따라 나오던 지현이가 멈춰 섰다.

“자… 잠깐만요.”

“…?”

“발렛 맡겼거든요.”

“발렛?”

지현은 씩-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매니저 앞으로 걸어갔다.

“제 차 좀 빼주시겠어요?”

“아! 아… 네…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매니저는 허둥대며 전동킥보드를 가져왔다. 지현이가 전동킥보드에 키를 넣고 돌리자, 푸른빛의 새파란 LED 라이트가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황당한 얼굴로 서 있는 남자를 그녀가 싱긋- 웃으며 바라봤다.

“고객님. 이제 출발할까요?”

맑은 얼굴로 웃고 있는 지현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혹시 차가 수동기어는 아니죠? 제가 오토는 엄청 운전을 잘하는데… 수동은 못 해봐서요.”

“오토예요.”

“그럼 마음 푹 놓으세요. 오토는 저한테 완전 장난감 수준이거든요.”

지현은 기세등등하게 주차장을 향해 킥보드를 몰았다. 하지만 남자가 멈춘 자동차 앞에서 그녀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잡지에서나 가끔 보던 고급외제차였다. 대리운전계의 선배들에게 들었던 꼭 피해야 할 차들 중 하나였다. 자칫 스크래치라도 내는 날에는 평생 알바 노예로 살아도 해결이 안 될 차였다. 지현은 크기에서부터 압도당해 마치 귀신을 본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지현의 어깨를 톡- 눌렀다.

“기사님? 출발 안 해요?”

“이차 이름이 혹시… 마… 마… 그거 맞아요?”

“그럴걸요?”

“시… 십억 넘는?”

“음… 조금 더 비쌀걸요?”

지현은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그런 지현을 여전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한데요… 다른 기사님 부르시면 안 될까요?”

“갑자기 왜요?”

“이 차 운전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저 인생 완전 쫑나거든요. 저보다 훨씬 운전 잘하는 분으로 불러드릴게요.”

“오토는 완전 장난감 수준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죄송해요. 제가 실언했어요.”

남자는 고급외제차에 기대서서 지현을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 아직 대학생이거든요, 운전경력도 얼마 없고… 특히 이런 차는 정말… 무서워요.”

“운전 잘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장난감 수준이라고 아까….”

“…정말 죄송합니다.”

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남자에게 사과했다. 남자는 싱긋- 웃는 얼굴로 운전석 문을 열어줬다.

“운전해요, 사고 내도 물어내라고 안 할 테니까.”

“….”

“피곤해요. 다른 기사님 불러서 또 기다릴 시간도 없고.”

“…진심이세요?”

“속고만 살았어요?”

남자는 시크한 얼굴로 돌아가서, 조수석에 올라탔다.

“안 갈 거예요?”

“….”

“기사님?”

“…가… 가야죠.”

지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생전 처음 본 전자장비들과 압도적으로 고급스러운 실내를 두리번거리며 그녀는 우왕좌왕했다. 남자는 곁눈질로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