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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스해! 따귀라도 후려치든가!
‘여자였어?’
인상을 찌푸린 남자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운전석에는 여자가 있었다. 불편하게 모로 누워 동글게 몸을 움츠린 여자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고개를 가로젓는 게 보였다.
팔짱을 끼고 서서, 자동차 안을 내려다보고 있던 찬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는 거야? 꿈까지 꾸면서? 하!”
갑자기 팔을 휘적거리는 여자의 옆에는, 예상대로 카메라와 망원렌즈가 있었다.
목을 한번 살짝 꺾은 남자는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후….”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에 여자가 깨길 바랐지만 예상대로 오산이다. 인내심을 갖고 한 번 더 두드렸다.
탁! 탁! 탁!
아주 깊고 달콤한 잠에 빠진 게 분명했다. 먹다 만 과자 봉지와 빈 물병들이 차 안에 나뒹굴고 있었다.
“…가관이군.”
양손을 허리에 얹은 찬주는 주위를 둘러봤다. 시시껄렁한, 이런 아마추어를 상대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돈 몇 푼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을 따라다니고 귀찮게 하는 것을, 그의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디 먹히지도 않을 사진 몇 장이 전부인 걸 알지만, 성격상 정리는 해야 한다.
빠르게 자신의 차로 다가간 그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
“오진주… 도망쳐… 어서.”
눈을 꾹 감고 있는 시원은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으… 안 돼.”
빨리 운전석 문을 열어야 하는데, 왠지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몸이… 왜 이러지… 으….’
봑봑.
‘……?’
짧은 경적 소리에 여자가 잠시 고개를 드는가 싶더니, 다시 제자리로 폭 고꾸라졌다.
얼굴을 찌푸린 찬주는 더 세게, 길게 눌렀다.
뽜앙.
“악!”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본능적으로 양팔은 머리를 감쌌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전신을 흔들었지만, 이내 고요해진 주변을 느꼈다.
마른침을 삼킨 시원은 질끈 감았던 눈을 살그머니 떴다.
‘뭐… 야?’
상체를 일으키던 그녀는 코앞에 서 있는 차를, 그 안의 남자를 발견했다.
“…윤찬주?”
아직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눈을 크게 깜박이는데, 어느새 차 밖으로 나온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흐어….’
살그머니 다시 누우며 두 눈을 슬쩍 감았다.
‘이건 꿈이야! 꿈이어야 해.’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깊게 잠든 듯 입술을 살짝 벌렸다.
잠잠하다.
실눈을 뜬 시원은 자신이 잠결에 헛것을 봤다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혹시나 하며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린 순간, 코앞에서 손짓하는 남자를 발견하고 말았다.
“내려요!”
역시 꿈이 아니었다.
“깬 거 다 알아요. 내려요.”
***
두 시간 전.
문제의 검은 세단이 특급 호텔의 입구로 들어섰다. 시원은 30분 째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하며 그 뒤를 밟는 중이었다. 천천히 핸들을 돌리던 그녀는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차의 주인이 발레파킹을 맡기면 좀 곤란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세단은 예상대로 호텔 입구를 미끄러지듯 지나쳤다.
“좋았어.”
다행이다.
이왕이면 차 안에서 해결을 보는 편이 그녀로서는 유리했다. 소란과 난동, 고소나 고발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니까.
하지만 나이 지긋한 그 도어맨은 시원을, 정확하게는 시원의 ‘똥차’를 단박에 알아봤다.
정중한 인사를 건네는 그의 미소에서, 재회의 반가움이 묻어났다.
“네, 맞아요, 클래식 카! 또 왔슴미다!”
당당한 표정을 허공에 날린 그녀는 지그시 가속 페달을 밟았다.
***
멀찌감치 주차를 했다.
잽싸게 들어 올린 카메라를 단단히 움켜쥔 시원은 렌즈의 초점을 세단에 맞췄다. 곧 문이 열리고 한 쌍의 남녀가 내렸다.
찰칵찰칵찰칵.
시원은 연거푸 셔터를 눌러댔다. 예쁜 여자의 얼굴에 초점을 맞췄다.
찰칵찰칵찰칵.
“자, 다음은 당신, 여길 봐!”
순간, 대답이라도 하듯 남자가 시원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찰칵찰칵찰칵.
드디어 잡았다!
다시 숨을 멈추고, 찰칵찰칵찰칵. 신났다.
‘자, 이제 같은 앵글에… 그래, 조금만 더….’
헙!
갑작스럽게 렌즈를 통해 맞닥뜨린 서슬 퍼런 두 눈동자! 시원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날 본 거야?’
그녀는 좌석에서 엉덩이를 빼며 최대한 몸을 낮췄다. 하지만 카메라를 쥔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무심한 표정의 남자는 이내 성큼성큼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고, 여자가 잰걸음으로 따라붙었다.
“휴, 그럴 리가 없지.”
시원은 자세를 고치고 다시 셔터를 눌러댔다.
여자는 남자의 소매에 매달리고 싶은 듯 자꾸 달라붙지만, 엘리베이터 버튼을 휙 누른 남자의 손은 바지 주머니 속으로 다시 숨어 버렸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영 데면데면하다.
‘사귀는 거 다 알아! 뭐가 문제야?’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한, 배고픈 시원은 짜증이 나려 했다.
“아무도 없다고! 보통은 이럴 때 뭘 하겠니? 빨리 한 번 하자! 퇴근 좀 시켜 주라.”
렌즈 안에서, 다시 표정 없는 남자의 얼굴이 시원과 마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쫄지 않았다.
대신 충분히 뜯어봤다.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흰 얼굴과 대비되는 검고 깊은 눈동자.
움푹 들어간 뺨과 높은 코, 날렵한 턱선을 소유한 남자는 내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올 블랙으로 멋을 부린 그는 머릿결마저도 검은 벨벳처럼 부드러운 빛을 냈다.
차가우면서도 몽환적인, 묘한 매력을 풍겼다. 세련되고 늘씬한 그 남자는, 화려한 여자와 꽤 잘 어울렸다.
그런데 다시 봐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셀럽? 이거슨… 대어인가?’
여자의 말에,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흘렸다.
웃는다!
찰칵찰칵찰칵.
미련 없이 시원하게 찍어 버렸다.
최초로! 치명적인 눈빛을 자랑하는 퇴폐미 요정을, 세상에 알린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미리 기뻐하는 순간, 커플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빛처럼 차에서 튀어나온 시원은,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에 섰다. 순식간에 올라간 엘리베이터는 24층에서 ‘띵’ 소리를 내며 멈췄다.
mon_cadeau.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긴 식사를 하려는 모양이다.
시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차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몽갸도’는 특히 비싸고 고급스러운 요리로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밀회를 나누기에 적당하다. 싸구려 가십 따위를 생산할만한 입도 없을 테고.
‘지금이라도 따라 올라가? …말아?’
가지도 오지도 못한다. 5일 동안, 하루 평균 20시간을 자동차에 구겨져 있었다. 집중력은 바닥을 보였고, 신경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밥 두 시간 먹는다고 파리지앵 되냐고! 이 사람들아!”
언짢은 그녀의 목소리가 지하 주차장에 울렸다.
차로 돌아온 시원은 에너지바를 꺼내 물었다.
이제 겨우 오후 두 시다. 뻑뻑한 식사 덕분에 가슴이 답답했다.
생수병의 뚜껑을 열며 남자의 서늘한 눈빛을 떠올렸다. 역시 따라붙지 않기를 잘했다.
미지근한 물로 입술을 적시며 눈으로는 검은 세단을 훑었다.
“…주인 닮아서 잘 빠졌다.”
오진주와 엮인 걸 보니 보통 남자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씽긋, 짧은 미소를 짓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어떨지 궁금해졌다.
목소리가…?
“왜? 어디다 쓰게? 차시원, 미친 거니?”
그녀는 핸들에다 이마를 콩콩 찧었다.
“멍청이! 정신 차려!”
찍은 사진을 살펴보던 시원은 남자의 얼굴을 확대해 봤다. 윤기가 나는 검은 머릿결이 부드러워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헐… 아, 휴대폰이… 어디 있나.’
헛기침을 한 그녀는 공연히 허둥대며 남자의 사진을 아는 기자에게 보냈다.
“아휴, 갑자기 왜… 덥고 난리야.”
뜨거워진 뺨에 손으로 부채질을 해대던 그녀는, 운동화를 벗어 버리고 좌석을 뒤로 밀었다.
띠링.
[누군지 몰라? 일림 미술관 대표 윤찬주! 근데 왜? 뭔데? 같이 좀 알쟈.]
‘윤찬주’ 검색을 해봤지만 건질 게 딱히 없었다. 역시 ‘대어’임이 분명하다.
바라건대 그 둘의 직접적인, 애정 신이 묻어나는 장면을 빨리 얻고 싶을 뿐이었다.
한숨을 내쉰 시원은 휴대폰을 옆좌석에 던져 버렸다.
‘미술관…? 폼은 나네.’
이마 위에 손목을 올리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상대에게 일말의 빈틈도 주기 싫은 것 같은, 그 서늘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 그에 비해 오진주는 마치 죄인처럼 쩔쩔매며 상대방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 더 사랑하는 쪽이 죄인이지. 아무렴.’
오진주같이 예쁜 여자를 비굴하게 만든 윤찬주, 그는 도대체 어떤 남자일까.
‘신이시여, 분명히 유별난 저 남자의 식욕이 갑자기! 떨어지게 해주옵소서. 아니면 디저트라도 생략하고… 빨리, 다시 제가 있는 이곳에 나타나 입 맞추게 하소서. 간절히 기도 합니다.’
잠들면 안 되는데 너무 피곤했다.
***
오진주. 대주 그룹 창업자의 손녀. 아이돌 출신 배우. 셀러브리티. 그리고 트러블메이커. 잇단 음주운전으로 자숙 중인 그녀의 열애 첩보를 입수한 것은 지난주.
시원은 잠복 5일 만에 문제의 상대를 만난 것이다.
누구나 알만한 미남 배우, 혹은 톱 가수를 기대했다. 왜? 사진의 가격을 두 배는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디서 저런… 빈틈없고! 새까만! 남자가 나타났다. 표현을 못 하는 사람인가. 아님, 표현할 게 애초에 없는 건가.
시원은 어제 마사지를 받으러 스파로 달려가던 오진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것은 분명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한껏 멋을 부린 여배우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10분 동안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시원은 직감으로 곧 남자가 도착할 것을 알고 쾌재를 불렀지만, 초조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혀를 차기도 했다.
‘으이그, 바보같이.’
또 혀를 찬 시원은 크게 하품을 했다.
불편해진 자세를 다시 고쳐 앉았다.
‘칫, 블랙 성애자. 누가 보면 장례식에라도 참석하는….’
감겨 있던 시원의 눈이 반짝 떠졌다. 양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설마?”
그 무표정하고 냉랭한 태도. 상대방을 기죽이는 서늘한 눈빛. 갑자기 상체를 꼿꼿하게 세운 시원은 남자의 차를 멍하니 바라봤다.
“젠장….”
전에 뒷북을 쳤다며 분통을 터트리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조금만 주의 깊게 봤더라면 헛발질은 안 했을걸… 에이c, 시간만 버렸어!]
“하….”
고개가 꺾이며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싸우건 갈라서건 보이는 데서 해주면 좋을 것을.
‘오진주, 일단 위에서 열 받고… 내려와서 들이받아?’
노력에 대해, 최소한의 대가라도 얻고 싶어진 시원은 눈알을 굴렸다. 쇼킹한 싸대기라고 해봤자 달콤한 키스만큼 가격이 나갈 리 없다.
차가 여기 있으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시원은 좌석을 완전히 뒤로 젖혔다.
다시 하품이 나왔다.
***
어느새 세단 안에 남녀가 앉아 있었다. 둘 다 정면을 응시하는 멍한 눈이다.
“어? 언제 내려왔어?”
시원은 서둘러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주차장이 어두침침한 게 불안함이 밀려왔다.
주위의 다른 차들은 전부 사라졌고 그들이 탄 검은 세단과 자신의 차 두 대뿐이다.
카메라를 쥔 손에 땀이 차올랐다.
“…뭐해? 키, 키스 안 해?”
영 불쾌한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는 남자의 무표정한, 얄미운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어졌다.
“됐어! 오진주, 그냥 한 대 후려쳐! 확 물어뜯든가!”
순간 렌즈 속 남자의 눈이 찌르듯 자신을 쏘아봤고, 시원은 흠칫 놀랐다. 사람의 눈이 아니라 짐승의 그것처럼 보였다!
남자가 여자의 목을 움켜잡았다. 당장에라도 송곳니를 드러낼 것처럼 보였다.
“이런, 도망쳐! 인간이 아니잖아… 어서!”
카메라를 집어 던지고 운전석 문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으으… 안 돼… 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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