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인트 적립 필요하세…….”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강남의 한 백화점.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나온 여성의 대답에 직원은 뻘쭘한 미소를 지었다.

“영수증 드릴…….”

“아무것도 필요 없다구요.”

“아, 네….”

약간은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직원이 카드를 건넸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손님.”

민망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직원은 끝까지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며 매장 입구까지 손님을 배웅했다.

그런 직원의 인사에도 별 대꾸 없이 매장을 나서는 그녀.

그녀의 또각거리는 도도한 구두 소리만이 매장 안에 남았고, 매장 안 직원들은 하나, 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와, 봤어? 들고 있는 쇼핑백 전부 명품인 거. 뭐 하는 여자길래….”

“그럼 뭐해. 싸가지가 없던데.”

“내가 봤을 땐 딱 업소 다니는 사이즈야.”

타인에게 ‘싸가지’, ‘업소 다니는’ 등의 평가를 받는 그녀의 이름은 ‘민설하’였다.

이제 막 미국에서 들어온 그녀는 남석 그룹 ‘박남기’ 회장의 외손녀로, 백화점을 휩쓸기라도 할 기세로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와 몸매의 소유자인 그녀는, 그야말로 돈 되고, 얼굴 되고, 몸매까지 되는 완벽한 여자였다.

정작 그녀는 자신에 관한 타인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지만.

*

“아버님. 이것 좀 드세요.”

설하의 집.

며느리 ‘미영’이 포크에 과일을 짚어서 박남기 회장에게 건네고 있었다.

“설하. 회사에서 일 시킬 거야.”

“…….”

박 회장의 말에 미영의 팔이 허공에서 멈췄고, 미영과 함께 앉아 있던 박 회장의 큰아들이자 설하의 외삼촌 ‘정석’도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너무… 빠른 거 같은데요. 한국 돌아온 지도 얼마 안 됐…….”

“사람 구실은 시켜야 할 거 아니야!”

“너무 재촉 마세요, 아버지. 불쌍한 아이잖아요.”

정석의 말에 박 회장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사실 정석은 박 회장이 설하를 오냐, 오냐 해주며 사는 대로 살게 두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걸 기대하기엔 박 회장은, 생각한 건 무조건 실천에 옮기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박 회장의 뚝심은 항상 올곧은 방향으로 뻗어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설하에게 일을 시키려고 한다는 건, 단순히 업무 능력만 키우려는 목적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녀석은 아직 못 컸어. 10년 전 그대로야.”

아니나 다를까…

박 회장이 천천히 말했다.

“네가 조카 크는 거 좀 도와.”

“…예.”

*

설하가 어린 시절, 박 회장은 교통사고로 딸과 사위를 잃었고, 유일하게 딸의 흔적인 설하만이 박 회장의 곁에 남아주었다.

어린 것을 불쌍하게 여겨 오냐오냐 키운 탓일까.

설하는 할아버지의 바람대로 커 주질 않았다.

“어, 왔나 보다.”

때마침 설하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설하야, 저녁 먹게 일찍 들어오라니까.”

외숙모인 미영의 말에도 설하는 대꾸가 없었다.

“여기 앉아라.”

“제 방에 부탁드려요.”

할아버지의 부름에 도우미에게 자신이 들고 온 쇼핑백들을 맡긴 후, 설하는 자리에 앉았다.

“말씀하세요.”

“내 카드 열심히 긁고 다녔더라?”

“한, 두 번 아니잖아요.”

“할애비가 말하는데… 너, 다음 주부터 회사에서 일해.”

“당연히 마케팅업무죠?”

설하의 대답에 외삼촌 정석과, 외숙모 미영이 서로 놀란 듯 눈을 마주쳤다.

바로 싫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더니, 의외로 덤덤하게 대답하는 설하의 모습에.

“천천히 일 배우면서 차근차근 올라와.”

“올… 라와? 꼭 평사원부터 시작하라는 말처럼 들리네요.”

“맞아. 평사원부터 시작해야 제대로 일을 배우지.”

설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 미국에서 공부할 만큼 했거든요? 왜 이래요?”

“공부랑 직접 일하는 거랑 같아?”

“남녀 차별해요? 사촌오빠들은 안 이랬잖아요.”

실제로 그랬다.

외삼촌 정석의 아들 둘은 팀장부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자신에게도 팀장부터 일을 시작하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평사원?

“넌 사람들 속에 어울릴 필요가…….”

“아직도 그렇게 보고 있네요, 절. 유학도… 하.”

설하의 정색에 박 회장은 시선을 돌렸고, 설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일? 안 해요.”

*

‘넌 사람들 속에 어울릴 필요가…….’

그 길로 집을 나온 설하는 입술을 짓씹었다.

“하아. 평사원부터 일하면 나를 믿긴 할 건가?”

그리곤 허탈한 빈 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모르고 계셨다. 내가 이러고 사는 이유를.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거 좋아하네.”

잠시 옛날 일을 떠올리던 설하는 고개를 젓다가 떨리는 손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흠….”

설하가 집을 나가버리자, 박 회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너무 쉽게 일을 하겠다고 대답하더라니.

“아버지… 왜 하필 평사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석은 속으로는 내심 안심했다. 자신의 아들들과 차별 대우를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을 했기에.

“밑에서부터 일 시킬 거야. 차 팀장한테도 그렇게 말해뒀고.”

“차… 팀장이요…?”

*

“설하야!”

룸으로 들어서자 잔뜩 들뜬 목소리로 설하를 반기는 여성.

설하의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는 ‘이영인’이었다.

“얼레? 한국 와서 처음 보는데 표정이 왜 그래?”

남들 앞에서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하는 건 설하의 특기가 아니었다.

할아버지와의 짧은 언쟁 끝에 다짜고짜 집에서 나오긴 했지만, 밤중에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강남의 한 술집에서 놀고 있다는 친구 영인을 찾아온 것.

“그냥, 좀. 그런데… 혼자 마셨어?”

“설마~ 너 온다고 선수 초이스 다시 한댔지.”

“초이스?”

“어머, 예쁜 언니 왔네? 내가 정말 잘생긴 애들로 보내줄게.”

그리고, 그때 매니저로 보이는 한 남성이 룸으로 들어왔다.

남성의 말로 미루어볼 때, 이곳은….

“야!”

“아, 깜짝이야. 너 이런 데 처음 와 봐?”

“호스트바가 말이야, 지금?”

호스트바였다. 생전에 와볼 일이 있을까 했던 그곳.

이런 곳에서 누가 노나 했더니, 나였네.

“알고 온 거 아니었어? 그렇게 나오면 내가 이상해지잖아.”

“그래, 언니. 그냥 하루 재미있게 놀다 간다고 생각해.”

영인이 황당하다는 듯 설하를 쳐다보았고, 매니저도 옆에서 거들었지만, 설하의 답은 하나였다.

“혼자 재밌게 놀아, 이영인.”

*

“아, 짜증 나. 지금 내가 뭐 하는…….”

환멸을 느끼며 룸에서 나온 설하의 눈에 카운터가 눈에 들어왔다.

카운터 한 편에 놓여있는 카드기.

카드기를 보는 순간, 설하는 다시 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뭐야? 다시 올 거믄서!”

“여기서 결제하면 가게 이름 나와요?”

“아, 상호명이 나올까 봐 그랬구나? 다른 상호명으로 문자 가게 해줄까?”

다시 들어온 설하는 친구 대신, 매니저에게 물었다.

“아니요. 이 자리 오늘 내가 계산할 거니까, 상호명 무조건 크게! 표시해서 문자 보내줘요.”

*

“뭐야, 민설하 완전 내숭.”

“오늘만이야. 뭐, 덕분에 누구 화나게 할 수 있겠네.”

“누구? 남자친구 있냐?”

“…….”

설하는 영인의 질문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한 번 놀아 봐. 의외로 재밌다?”

노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가게 상호가 찍힌 문자를 받게 될 카드 주인을 화나게 할 목적만 있었을 뿐.

“아. 너 처음 노는 거니까 말하는 건데, 선수 중에 공사 치려는 애들 있으니까 조심해라.”

“공사? 그건 뭔데.”

‘선수’라고 불리는 직원들이 들어오기 전, 영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안에서는 돈을 많이 못 버니까, 손님이랑 밖에서 따로 놀면서 큰돈 벌려는 뭐, 그런 거 있어.”

“하는 짓 하곤.”

잠시 뒤, 우르르 들어온 선수 중에서 초이스 당한 선수 세 명이 룸 안으로 들어왔고,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하 옆에 유독 딱 달라붙어 있는 한 선수.

“와, 이렇게 예쁜 손님은 처음이에요.”

“너희가 제일 잘생긴 거 맞니?”

분위기 따위 맞춰줄 생각이 없는 설하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룸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설하는 자신이 만든 분위기에도 ‘뭐, 어쩌라고.’ 식의 표정을 지었다.

“얼굴은 조금? 마음에 안 들지 몰라도 우리가 제일 잘 놀아요.”

“그래? 그럼 재밌게 놀아 봐, 한 번.”

한 선수가 능청을 떨며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설하는 무표정으로 술만 홀짝거릴 뿐이었다.

그런 설하와 달리, 영인은 이 자리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었다.

저리도 좋을까…….

*

“나, 지난주에 반창회 갔다 왔잖아. 참 재미없더라.”

호스트바 선수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영인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반창회를 왜 해, 쓸데없이.”

“그러니까. 그런 거 보면 박 회장님도 참 특이하셔? 기업 총수가 손녀를 일반 고등학교에 보낸 거 보면.”

설하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수준 안 맞는 애들이랑 있는 학교에서 있으니까 그런 일이 생기….”

“이영인. 난 그때 이야기 별로 한 적 없는데 아는 척 그만하지?”

“아, 나는 네 입장을 이해한다, 이거지.”

설하가 웃음기를 감추자 영인이 말을 버벅거렸다.

“잠시 차에 좀 갔다 올게.”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쉰 설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내가 뭘 했다고.”

홀로 차에 앉은 설하는 영인 덕에 고등학생 시절을 잠시 떠올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억울했던 그때를.

자신과 함께 놀았던 친구들의 달라진 반응을.

“됐어,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면 뭐 해. 박 회장은 날 못 믿는데.

그러니까 아직도 사람들이랑 어울릴 필요가 있다고 말하지.

고개를 젓던 설하는 오르기 시작하는 술기운에 잠시 고민했다.

처음 와 본 이곳은 자신의 상상과는 매우 달랐다.

이런 곳에서 노는 거엔 취미도 없었고, 노는 것도 처음이긴 하지만, 이왕 노는 거 잘생긴 사람이랑 놀면 좋잖아.

이대로 대리를 불러 집에 갈까 잠시 고민하던 설하는, 자신이 이곳에서 억지로 있었던 이유를 중얼거렸다.

“하… 가자, 박 회장님 속 뒤집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