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흔한 만남

300미터 앞에서 좌회전입니다!

‘전방 300미터라… 300미터면 어느 정도 거리야? 아… 더 일찍 나왔어야 했는데.’

하영은 전방을 주시하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몇 년 전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꼭 다녔던 곳인데도 그녀에겐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눈치’ 하나는 업계 최고임을 자신하는데 문만 열고 나오면 구제 불능 ‘길치’에다가 ‘방향치’였다.

‘조상 탓이야, 조상 탓!’

입버릇이 되어 버린 조상 탓을 하며 엄습하는 불안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양 갈래 길이 보이자 좌측 방향등을 켰다. 불현듯 화가 치밀었다.

“아니, 무슨 면접을 사무실 놔두고 스튜디오에서 본다는 거야? 또라이 아냐?”

경기도 레인보우 스튜디오 수요일 3시.

시계는 벌써 2시 50분. 약속 시간까지 이제 10분 남았다.

‘제발 하영, 틀리지 말자… 길을 잘못 들지만 않는다면 시간 내 도착할 수 있을 텐데….’

사무실을 내놓은 지 두 달 만에 임자가 나섰다며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고 계약서를 쓰기로 한 날이 오늘인데 면접까지 겹쳐 버리게 된 거였다. 임대료만 내고 있던 사무실 계약도 중요했지만 하영은 취업도 간절했다.

경력이 많고 나이도 많은 하영이 지원할 수 있는 회사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마침 CG팀장을 구한다는 영상 카페 구인 광고를 보고 바로 이력서를 넣었고 갑자기 오늘 당장 면접을 봤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시작되는 프로젝트 때문에 당장 면접을 봤으면 좋겠다며 남자는 굳이 스튜디오로 와 줄 것을 요청했다.

‘아마 대표쯤 되겠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기 마련이니까 시간이 애매하다는 걸 알지만 욕심을 부려 본 건데… 결국 망할 놈의 길 찾다가 늦을 것 같다. 주유 램프에 불이 켜졌다.

삑삑, 핸드폰 배터리 9%.

‘그렇지, 가난은 원래 한꺼번에 찾아오는 법이니까.’

차량용 배터리 충전기를 핸드폰에 꽂으며 투덜댔다.

500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500미터라… 그래 저기서 우회전.’

앞에 보이는 우측 샛길을 따라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면서 스튜디오 간판을 찾았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아이고, 조상님!’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스튜디오. 시계는 벌써 3시 15분을 가리키고 있다.

‘썩을!’

결국 늦고 말았다! 5층 건물의 스튜디오 앞엔 많은 차들이 들어차 있었고 대충 빈틈에 구겨 넣다시피 파란색 해치백 타입의 승용차를 주차하고 급하게 내렸다.

‘입구가 어디지?’

촬영 콘셉트에 맞춰 A, B, C로 구분된 스튜디오는 규모가 꽤 컸다. 주차장에서 바로 연결된 입구가 없어 하영은 시계를 힐끗거리며 건물을 따라 돌아갔다. 1층은 부분 필로티 형식으로, 벽면에 숲속 폭포수를 표현한 트릭 아트가 그려져 있다. 그림은 멋진데 입구가 어딘지 표시가 없다.

‘엥? 입구 없어?’

계속 이어진 건물을 따라 한참을 뛰었다. 다시 주차장이다.

‘입구를 못 본 건가?’

이번엔 걸어서 다시 건물을 따라 돌았다.

‘그림이 너무 사실적이라 내가 못 찾나? 이상하다! 입구가 없다! 아니 그림을 그리더라도 문 표시는 해야 할 거 아냐! 뭐, 열려라 참깨라도 외칠까?’

“이씨, 급해 죽겠는데….”

갑자기 벽면에 그려진 거대한 바위들이 흔들린다.

‘뭐지? 공황이 온 건가?’

금세 굴러 떨어질 것처럼 흔들리던 바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꺅!”

하영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피하다가 발이 접질려 휘청거렸고 반사적으로 넘어지는 그녀의 팔을 잡는 손이 있었다. 중심을 잃고 뒤뚱대던 하영이 마침내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움켜쥐고 제자리에 섰다.

“휴, 나 살았나? 아니 왜 벽이 갈라지고 난리야!”

“놔요!”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놔줬으면 좋겠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리더니 낯선 입술과 낯선 사람의 멱살을 잡고 있는 그녀의 왼손이 마치 증거 사진처럼 하나씩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낯선 남자의 미간을 잔뜩 구겨 놓은 듯 일그러진 눈동자가 나타났다!

“무. 겁. 습. 니. 다.”

“헐!”

잡았던 하영의 오른팔을 던지듯 뿌리치며 남자가 말했다.

“네? 아… 죄송합니다, 딸꾹.”

갑작스러운 딸꾹질에 놀라 하영은 입을 막았다. 후드 점퍼에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멱살을 풀어 주자 별 정신 나간 여자를 다 보겠다는 듯 시선을 던지고는 목을 좌우로 가볍게 젖히며 걸어갔다.

딸꾹! 딸꾹!

이 느닷없는 딸꾹질은 뭔지… 망신살이 제대로 뻗쳤다.

“아니, 스튜디오면 스튜디오다워야지. 나처럼 방향 감각 없고 공간 지각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아무리 아트라도 입구는 제대로… 헐! 있었네, 입구.”

할리우드 간판처럼 멋지게 바위그림에 돌려 적혀 있는 글씨는 정확히 ELEVATOR!

심지어 바위벽에 상징처럼 버튼이 있었다.

‘꼭 벽에다 이런 짓을 해야만 속이 후련했냐! 후, 일단 정신 좀 차리고….’

버튼을 누르자 바위산이 갈라지며 엘리베이터 내부가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모세의 기적이라도 느끼라는 건가? 어이없어.”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딸꾹.”

“면접 보러 옵니까?”

“네! 지금 엘리베이터, 딸꾹, 탔어요.”

휙 뒤돌아보는 남자. 문이 닫혔다.

**

엘리베이터 앞은 불규칙적으로 쌓여 있는 촬영 장비들 때문에 복잡했다. 하영은 주변 기물에 닿지 않으려 이리저리 피해서 조심스럽게 스튜디오로 들어섰지만 누구 하나 그녀의 존재를 관심 있게 봐 줄 여유가 없는지 분주하기만 했다.

‘저 사람인가?’

프리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주변 스태프와 얘기 중인 남자가 보였고 그냥 느낌이 책임자인 것 같았다.

“유리 씨, 카메라 보지 말고 다시 한 번 가봅시다! 자, 하이, 고!”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인 아이돌 가수 ‘유리’가 골프채를 들고 건강한 미소를 지으며 스윙 포즈를 취했다.

‘우와, 저 터질 듯한 가슴, 잘록한 허리, 그리고 저 다리 길이 어쩔 거야? 골프 선수는 건강미가 돋보이는데 어째서 광고는 늘 비현실적인 모델일까?’

많은 광고 후반 작업을 할 때마다 대면하는 의문을 광고 제작 현장에 면접 보러 와서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메이크업은커녕 로션만 처덕처덕 바르고 나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미안해졌다.

화장이라는 행위와는 담쌓고 살아왔던 하영이었지만 어여쁜 모델을 보니 어처구니없게도 위축이 됐다.

‘뭐, 모델 면접은 아니니까.’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어색하게 손목시계를 보던 하영이 3시 25분을 확인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는데 그냥 가버려? 이 회사는 나랑 인연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면 간단할 일인데….’

방송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늦었다는 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하영이기에 지금의 상황이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래 가자! 전화 오면 안 받으면 되지 설마 또 볼일이 있겠어?’

번호를 차단하는 걸로 마음을 굳히며 자연스럽게 뒤돌아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려가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꾸욱!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저승사자처럼 좀 전에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던 그 후드남이 서 있었다.

“혹시 양하영 씨?”

“네? 아, 네….”

멱살 잡혔던 부위가 불편한지 목을 만졌다.

‘아, 역시 고민은 길어 봐야 상처만 될 뿐인 것을… 갔어야 했는데, 정말 최악이다.’

“송! 잠깐 쉬자. 왔어.”

후드남이 허공에다 소리친다. 그리고 대충 장비 케이스에 걸터앉아 조연출로 보이는 이가 내미는 카메라의 촬영 영상을 확인했다.

“자, 다음 촬영 준비해 주시고. 김 감독, 다음 신은 좀 쨍한 느낌으로 부탁해!”

‘송’이란 사람의 목소리에 카메라 앞에 있던 감독이 손을 들어 OK 사인을 한다. 책임자라고 생각했던 ‘송’이라는 남자가 하영을 보고 유령처럼 팔을 위로 크게 흔들며 웃으면서 왔다.

‘어, 왜, 왜?’

분명 낯설었지만 미소가 익숙했다.

“와! 양하영, 진짜 하영이잖아. 나 주익이야, 송주익. 설마 잊은 건 아니지?”

잰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드는 남자를 가늘게 뜬 눈으로 보던 하영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송주익? 주익이라고?”

“그래, 나 송주익. 이게 몇 년 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이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건데.”

가지런한 치아… 해사한 미소가 햇살 같던 송주익. 기억난다, 그의 자전거.

“금 대표는 하영이 모르나?”

“…….”

“이쪽은 내 친구이자 공동 대표 금태현.”

‘대표? 텄다 텄어. 그래도 인사는 하자, 예의니까.’

“안녕하세요. 아깐 죄송했습니다.”

카메라를 응시한 채 조연출과 대화 중이다.

‘싸가지… 사과 정도는 받아 줘야 할 거 아냐!’

“양하영이란 이름은 이 일 하면서 꽤 여러 번 들었었는데 그게 너일 거라고 진짜 생각조차 못 했다. 너 무조건 같이 일하는 거다, 알았지?”

“우리 프로젝트랑 맞는지는 체크해 봐야 하지 않아?”

‘어이구! 무조건 반대를 하시겠다?’

“야 선수끼리 뭘 체크해. 딱 보면 알지.”

“딱 봐도 모르겠는데. 시간개념도 그렇고….”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 정상이시겠지, 야비하게 빈정대기는… 진짜 후드 좀 잡았다고 좀팽이같이 굴기는! 닳니? 닳아? 아오, 짜증 나!’

그래도 늦은 건 잘못이니까 애써 변명을 해본다.

“아, 그게 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하영의 변명에 주익이 마치 과거의 첫사랑이라도 만난 것처럼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맞다, 양하영. 너 엄청난 길치였어! 이야, 넌 어쩜 변함이 없냐.”

‘마이크 갖다 줄까?’

혼자서 신이 나서 웃고 있는 주익에게 촬영 스태프가 다가와 뭔가를 의논했다.

하영을 의식한 듯 포인트만 전달하고 갔지만 왠지 불청객이 된 듯한 기분에 마음이 언짢아졌다. 후드남도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스태프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저것들 뭐야, 백수 앞에서 일하는 거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 자극받아서 열심히 살아라, 뭐 이런 건가?’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바쁜 것 같은데 관련 자료 메일로 주면 확인해 보고 연락할게. 주익아, 다음에 보자.”

하영은 최대한 예의 바르지만 최대한 짧게 인사하고 뒤돌아 걸었다.

‘빌어먹을! 아침에 마시던 물 컵을 씻다가 길게 금이 가 있는 것을 보고 불길하다 싶더라니!’

투덜대며 촬영 장비들을 피해 엘리베이터로 가서 신경질적으로 열림 버튼을 눌렀다.

‘면접이라더니… 젠장!’

“야, 양하영! 야 좀 서봐! 앗! 금태현, 쟤 좀 잡아 봐!”

태현은 자신을 지나쳐 가는 하영과 그녀를 따라가다가 전선 케이블에 발이 걸려 비틀대는 주익을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양 보고만 있었다.

“야! 빨리!”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투덜대며 들어가는 하영의 손목을 태현이 성큼 다가와 잡아끌었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치 왈츠를 추듯 한 바퀴 돌아 남자의 가슴팍으로 들어갔다.

퍽!

이마에 둔한 충격이 느껴졌다.

“앗! 아, 진짜 짜증나는 사람…!”

욕이라도 해줄 요량으로 고개를 들자… 맙소사! 남자의 코에서 피…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 굴러다녔다. 후드남의 코에서 하영의 이마로.

이건 뭐… 똥 피하다가 똥통에 빠져 버린 기분이랄까…. 누군가 하영에게 저 코피를 트릭 아트라 말해 주면 좋겠다.

딸꾹! 딸꾹!

“미, 딸꾹! 미안합니다. 딸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