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디예요?”'“보면 몰라? 수영장이지.”'“근데 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그야 우리 집 별장이니까.”'재경이 눈을 떠보니 어느새 커다란 별장 앞에 차가 세워져 있었다. 별장에 달린 텅 빈 수영장에 재경이 경계심을 갖자, 민혁은 이곳이 자신들이 휴가철에만 사용하는 가족 별장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재경은 이로써 그가 부잣집 도련님이란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수영장이 굉장히 넓네요.”'“우리 형의 유일한 취미가 수영이거든. 언제든지 불쑥 나타나서 며칠씩 있다 가니까, 관리하는 분들이 자주 물을 갈아 주셔.”'민혁이 덧붙이는 설명을 재경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굉장히 시설이 좋은 수영장이었지만, 이렇게 깊고 넓은 물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재경은 일부러 물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자. 이리 와서 앉아 봐.”'“네? 아. 저는 별로.”'“괜찮아. 물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커다란 욕조라고 생각하고 발만 담가.”'하지만 민혁은 재경의 물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 주고 싶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그녀를 풀장 앞에 끌어다 앉히려고 했다. 언제까지나 불편한 일을 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그녀를 데리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었고, 재경이 힘들어한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아니었다.'“아무래도 안 되겠어요.”'“피하지 마. 평생 비가 올 때마다 괴로워하고 바다 구경 한 번 안 갈 생각이야? 십 년이면 이제 고쳐야 할 때도 됐어. 그러지 말고 좀 더 노력해 봐.”'재경은 뒤로 주춤 물러났지만 민혁은 단호했다. 재경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 몹쓸 공포심을 마음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방금 전 민혁이 손을 잡아 주었던 그 기분을 떠올렸다. 최대한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녀는 풀장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아…….”'풍덩.'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은 무리였을까. 재경은 풀장을 향해 걸어가는 동시에 엄청난 물보라가 자신의 눈앞에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환영에 휩싸였다. 심각한 어지러움을 느낀 그녀는 풀장의 물이 닿는 순간 그대로 쓰러지듯 기절해 버렸다. 그리고는 놀란 민혁이 손을 쓸 새도 없이 그대로 물속 깊이 빠져들었다.'“서재경!”'민혁은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자신의 실수로 재경을 위험에 빠트린 것이다. 그는 곧장 풀장으로 뛰어 들어가 재경을 구했다. 어떻게든 빨리 재경을 꺼내오기는 했지만, 기절한 상태로 물에 빠지는 바람에 그녀는 이미 물을 많이 먹고 호흡이 곤란한 상태였다.'“서재경! 눈 떠 봐. 내 말 들려?”'민혁이 재경의 볼을 두드리며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단 숨이 막혀 버린 그녀였기에 민혁은 그녀의 가슴께를 누르고는 인공호흡을 했다. 만약 미국에서 인공호흡을 배워 두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 뻔했다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민혁이 다급하게 재경의 입술에 서너 번 정도 숨을 불어넣었을 무렵, 그제야 재경은 기침과 함께 숨을 토해냈다.'“큭. 커억. 콜록. 콜록.”'재경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민혁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하늘이 어지럽고 다리가 풀려 버렸다. 재경은 한숨과 함께 쓰러지듯 주저앉는 민혁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아마도 수영장의 깊이에 압도된 나머지 잠시 기절했던 모양이다.'“미안해요. 갑자기 너무 어지러워서.”'그렇게 중얼거리자, 저만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던 민혁이 재경을 돌아보았다. 재경은 자신을 쳐다보는 강렬한 눈빛에 놀라 약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민혁은 조금 화가 난 것 같아 보였다. 아무래도 많이 놀랐을 거라고 재경이 생각하는 사이, 그는 그대로 그녀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재경의 양어깨를 꽉 쥐었다.'“아야. 아파요.”'“너 잘 들어.”'고통스러워하는 재경의 표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민혁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마주 보고 있는 재경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단호한 모습에 재경의 눈빛이 일순 고요해졌다.'“선배 추워요. 얼른 옷부터 말려야…….”'“좋아해.”'“네?”'“내가 좋아한다고. 서재경 너를.”'민혁은 줄곧 망설여왔다. 재경을 자신의 곁에 두어도 좋을지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방금 깨달았다. 그는 이제 그녀를 잠시라도 눈에서 떼어 놓으면 불안해져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남들의 시선이나 형에 대한 기억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민혁은 이제 오로지 제 욕심대로 마음이 시키는 길을 따라가려 하고 있었다.'“잘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재경은 민혁의 말을 분명히 들었다. 아니. 귀로는 들었는데 머리에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너무 놀랐던 나머지 실감이 나지 않았던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늘 그녀가 마음으로만 생각하던 말을 막상 민혁이 말로 꺼내자 혼란스러웠다.'“몇 번이고 다시 말해 줄까? 좋아해. 나 김민혁이 서재경 너를 좋아해. 아직 네 감정은 모르지만, 나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 난 포기 안 해. 이기적이어도 좋아. 네가 놀라든 불편해하든 상관없어. 너 정말 안 되겠어. 난 그냥 내 마음대로 할 거야.”'재경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겨우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한 관계가 다시 불편해질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지금까지 온전히 누군가와 사랑을 나눠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서투른 자신이 둘 사이를 망치지나 않을까 불안감이 엄습해왔다.'“그러니까 너도 극복해.”'그래.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훈련인지도 모른다. 민혁은 재경의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한 글자씩 힘주어 말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후회의 연속이었다면 앞으로는 하나씩 극복해나갈 것이다. 재경은 자신의 어깨를 쥐고 있는 민혁의 양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의 눈빛과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했다. 언젠가 또 그녀가 무너지려 할 때 지금의 이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