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새로운 변화의 시작 (1)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듯, 궁 안은 며칠간 꽤 고요했다. 희온에 관한 궁 안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차 잦아들었으며, 가여나 다른 후궁들이 희온을 입에 오르내리는 일 역시 없었다.

동국에서는 어지러운 정세로 인해 별다른 요구를 해오지 않았기에 현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동국 사절단을 가볍게 응대할 뿐이었고 조정 신료들 역시 몸을 사리며 자중했다.

하나, 이것은 더 큰 폭풍이 불기 직전의 전초 현상일 뿐이었으니 현은 만반의 준비를 하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마음을 다잡는 것에 집중했다.

“호월 대장의 움직임은 여전한가?”

“예. 폐하. 따로 출궁하는 일조차 없습니다.”

장현의 말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현.”

“예. 폐하.”

“조만간이다.”

현의 말에 장현의 동공이 살짝 부풀었다.

“동국의 주인이 바뀌는 겁니까…?”

“예상대로라면 앞으로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동국의 주인이 바뀌고, 우리 월국 또한 큰 변화를 겪게 되겠지.”

현이 의미 없이 아래를 응시하며 턱 끝을 잘게 매만졌다. 장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검을 쥔 손에 바짝 힘을 더했다.

‘어머니의 세력들을 하나씩 꺾어 나갈 것이다. 대소 신료들부터 시작해 후궁들 그리고 호월 대장까지.’

문득, 예전 후원에서 현이 말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정말 그리할 수 있겠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했을 때, 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버리고 동국과 결합만을 꾀하는 태후를, 이 나라 황제로서 응대하는 것뿐이다. 오롯한 월국을 세우기 위해, 난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담담하게 내뱉는 목소리 뒤로 슬픔 어린 눈을 하던 황제의 모습.

장현은 그때의 기억에 마음이 울컥했다. 꽤 오랜 시절 함께해 왔기에 그는 현이 왜 저토록 시리고 차갑게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태후는 아들을 끔찍이 생각했다기보단, 자신의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허수아비 황제가 필요했을 뿐이었으니까.

하나, 이제 그 가소로운 놀이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녀석은 좀 어떠냐.”

“온이라면 염려치 마십시오. 발목이 나은 후부터는 무서우리만치 훈련에 임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좀 변한 것 같기도 하고요.”

“하아….”

현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희온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미간에 옅은 실금이 그어졌다.

입맞춤이 있던 후, 마주치기만 하면 줄행랑을 쳐버리는 희온 탓에 현은 제대로 말 한마디 섞어 보지 못하고 있었다. 싫다면 하지 않겠다 했으니 싫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어지러워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탓에 현의 속만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조그만 게 사람 마음을 이리도 애타게 하나….”

당장에 무엇을 하자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신을 보면 홱 하니 피해 버리니 괜스레 속이 뒤집혔다.

“폐하. 해진사이옵니다.”

“들라.”

현이 생각을 멈추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해진사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종종걸음으로 그의 앞에 다가섰다.

“폐하. 동국의 태자 이신이 ‘무리’의 우두머리를 잡아들였다 하옵니다.”

“‘무리’의 우두머리라….”

이신, 어떤 식으로 네 아비를 끌어내릴 생각이냐.

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동국.

“그게 사실이더냐.”

“예, 폐하. 이신 태자 저하께서 그 ‘무리’의 우두머리를 직접 잡으셨다 하옵니다!”

내시가 두 눈을 반짝이며 기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백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리 든든하게 해결해 줄 것은 생각지도 못했건만. 역시, 아무리 모질어진 사이라 할지라도 자식은 자식인 법.

이백은 껄껄거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지금 태자는 어디에 있느냐. 내 직접 만나 그 공을 높여 줄 것이다.”

“태자전에 계시는 줄로 아옵니다. 소인 서둘러 다녀오겠사옵니다!”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말하는 내시를 보고 이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녀오라 손짓했다.

제 어미가 궁 밖을 나간 후부터 어쩐지 자신을 마주할 때면 살기를 띤 눈빛을 하더라니.

“자식은 자식인 법…. 그렇고말고.”

이백은 조용히 읊조리며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웃어댔다. 우두머리를 잡았으니 이제 문책을 연 후 소상히 하나하나 밝혀내면 그만이었다.

기회를 틈타, 자신에게 반감을 품은 대표적인 대소 신료 두어 명 정도를 본보기 삼아 잘라내 버릴 생각까지 하는 이백은 흡족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가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염려치 말라 든든히 말해 줄 생각까지 하니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닌가!

“밖에 누구 있느냐.”

“예. 폐하. 찾으셨사옵니까.”

“월국에 전갈을 보낼 것이니, 그자를 불러오라.”

“예.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가여에게 전갈을 보낼 적마다 항상 불렀던 궁 밖의 ‘잡일꾼’을 부르라 명한 후, 이백은 흐뭇하게 웃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

희온의 처소.

“무사님. 아까부터 영 표정이 좋지 않으셔요. 괜찮으세요?”

소양은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며 애꿎은 입술만 깨무는 희온을 걱정스레 쳐다보다 말했다. 이따금 작은 한숨도 섞어 내쉬는 것이 무언가 근심이 있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괜히 걱정 끼쳐 미안해요.”

희온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달뜨고 복잡해진 마음을 정리하려 현의 그림자만 보아도 피했건만 지금 희온은 무조건 현을 마주해야만 했다. 출궁을 하기 위해선 그의 허락이 필요했으니까.

“무사님. 근데 그거 아세요? 폐하께서 처음부터 저리 차가우셨던 건 아니시래요. 다정다감하시고 궁 안 사람들 누구에게나 다 따뜻하셨는데 하도 태후마마께서 난리를 치시니까 점점 변하신 거래요.”

소양은 희온의 처소 이곳저곳을 열심히 닦으며 재잘거렸다.

“그리고 사실… 그때 못 드린 말씀이 있는데요.”

머릿속이 복잡해 연거푸 한숨만 내쉬며 검을 닦고 있는데, 순간 들리지 않던 소양의 목소리가 희온의 귓가에 꽂혔다. 희온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소양을 쳐다보자, 소양이 문 쪽을 힐끗 쳐다보곤 희온의 곁으로 잽싸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태후마마께서 폐하의 아버지를…. 어, 음… 그러니까….”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소리로 희온의 귓가에 속삭이던 소양이 침을 꿀꺽 삼키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이셨대요.”

“예…?”

희온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자, 소양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주워들은 이야기라 정확하진 않지만…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자신의 남편을 죽이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대체 이 나라 황제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아….”

희온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유 모를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그 사내에 대해 알면 알수록 속절없이 약해지고 마는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인지.

피나도록 입술을 짓씹으며 이찬의 얼굴을 떠올려 봐도, 자신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따뜻하게 웃던 현의 얼굴이 찰나라도 떠오르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예? 무사님? 뭐라 말씀하셨어요?”

더는 이런 상태로 궁 안에 머무를 순 없겠다는 생각에 희온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머리론 안 된다고 수없이 되뇌어도, 이미 마음은 현에게 흘러가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소양을 향해 희온이 비장한 태도로 말했다.

“지금 폐하를 뵈러 가야겠습니다.”

***

태월전.

현은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희온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뚫어져라 쳐다봤다.

훈련장에서 스쳤을 때만 해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줄행랑을 쳤던 여인이 아닌가. 한데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제 발로 자신을 보러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현은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짓누르고 담담한 투로 말했다.

“무슨 일이더냐.”

낮게 깔린 현의 목소리에 희온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곤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청을 하나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청이라?”

예상치 못한 희온의 말에 현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여인이 자신에게 청을 하다니.

“지금 네가 나에게 청을 들어 달라 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폐하. 무례한 줄 압니다만…, 꼭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본 희온의 두 눈엔 귀여운 긴장감이 가득 들어 있었다. 현은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온이 네가 청이라니.”

현의 커다란 웃음소리에 희온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도무지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으나,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가까이 오거라.”

현이 희온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희온은,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말해 보아라. 어떤 것이든.”

“그것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터라,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무작정 해달라 떼를 쓸 수도 없는 것인데, 어찌 말해야 하나?

“말하기 어려운 것이면, 귀를 빌려줄까?”

희온을 가만히 지켜보던 현이, 얼굴을 들이밀며 바짝 다가왔다.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상체를 내빼자, 그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폐, 폐하 출궁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희온이 바닥에 넙죽 머리를 조아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쩌렁쩌렁 울려 퍼진 목소리에 현이 깜짝 놀랐다가, 이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