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너희 둘이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

옥황상제가 궁에서 나왔다. 상제는 신경질적으로 용포 자락을 휘날리며 돌계단을 내려와 두 연인 앞에 섰다. 그 뒤를 서왕모와 뇌신이 복잡한 표정으로 따랐다.

“안에서 들으니 가관이더구나! 어디 다시 한번 내 앞에서 말해 보거라!”

비꼬는 상제의 말에 화륜이 입을 열려는데 뇌신이 그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화륜은 더 이상 불효할 수 없단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흥! 또 말하기 부끄럽긴 한가 보군.”

“상제여,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서왕모가 재촉하자 상제는 용포 자락을 휙 소리 나게 휘날렸다.

“부인은 참으로 성미가 급하기도 하시오. 내 어련히 알아서 할까. 죄인 둘은 고개를 들 거라!”

포승줄에 묶인 화륜과 옥아는 고개를 들어 상제를 우러러봤다.

“내 너희 둘의 죄를 생각하면 처음 내린 판결도 가볍다 생각하지만, 이번 한 번만은 자비를 베풀기로 하였다.”

상제의 말에 두 연인의 눈에 희망이 비쳤다.

“아까 들어 보니 다음 생애가 어쩌구저쩌구 다시 사랑이 어쩌구저쩌구 하던데 내가 맞게 들은 것이냐?”

“네. 그러하옵니다.”

대답하는 화륜의 가슴이 사정없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반 시각 후면 먼지가 될 운명이었는데, 어쩌면 옥아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 그럼 어디 그래 보자꾸나.”

“그게 무슨 뜻이신지….”

“너희는 이제 불로불사에서 벗어나 기억을 잃고 환생을 거듭할 것이다.”

옥황상제가 판결을 바꾸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옥아는 서왕모가 얼마나 상제에게 빌었을지 가슴이 아팠다. 서왕모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시 만나 사랑한다면 천상으로 돌아오게 해주마. 그때는 서로의 반려로 인정도 해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제가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고 화륜과 옥아는 동시에 쓰러졌다.

“어찌 이별할 시간도 주시지 않고….”

서왕모의 말에 상제가 돌아서 쏘아붙였다.

“어차피 영영 이별하게 될 인연이오!”

***

“엄마 왜 그렇게 쳐다봐?”

하얀은 정장 상의를 입다 거울 너머로 자신을 빤히 보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첫 출근인데 안 떨려?”

어머니가 되묻자 하얀은 어깨를 으쓱했다.

“연수도 다 받았고, 뭐 아는 사람인데. 근데 올라가 봐야 할 시간 아니에요?”

하얀은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쳐다봤다.

“오늘은 좀 늦게 간다고 이야기했어.”

“어? 나 첫 출근이라서?”

방긋 웃으며 애교를 부렸지만, 어머니는 표정이 무거웠다.

“미안해, 하얀아.”

“뭐가?”

“엄마가 아침마다 저 집 가느라고 너 어려서부터 밥도 혼자 먹고….”

“왜 그래 엄마, 내가 어렸으니까 투정 부리고 그랬던 거지. 괜찮아, 나.”

“미안해 정말. 너까지 JM에서 일할 줄은 몰랐는데.”

“엄마, 나 정직원이야. 대기업 정직원. 그게 요즘 얼마나 어려운 줄 엄마도 알잖아. 응?”

어머니를 달래며 하얀은 자신이 얼마나 JM에 입사하기 싫어했는지 떠올렸다. 이 집을 벗어나고 싶어 죽도록 공부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몰랐다. 방에서 나가니 어머니가 그녀를 불렀다.

“하얀아, 사모님이 잠시 들르라는데.”

“어? 왜?”

“거기까지는….”

당연히 되묻지 못했을 텐데 괜한 질문을 했다 싶어 하얀은 어머니에게 웃어 보이고 집을 나왔다. 흡사 숲같이 넓은 정원 구석에 있는 작은 집에서 하얀은 부모님과 살았다. 높다란 담장보다도 낮은 천장을 가진 집. 그녀는 정원을 삥 돌아 정문 앞에 놓인 돌계단 위의 저택으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하얀이 인사하자 최 여사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이 첫 출근이라고?”

“네.”

“다른 부서도 많은데 하필 거기라니?”

“회장님이 직접 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남자들은 그게 문제야. 안 그러니?”

“어떤 점을 이야기하시는지 잘….”

“회장님이야 박 기사 입 무겁고, 사고 안 치고, 몇십 년 쭉 일한 거 좋게 봐서 딸인 너도 좋게 본 모양인데 네가 네 아버지 같다는 보장이 있니?”

왜 사람을 불러서 아침부터 긁고 있는지. 하얀은 어서 이 대화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회장님이 기대하는 건 네가 네 아버지처럼 입 무겁고 시키는 일만 잘하는 거야. 알겠니?”

“네, 사모님.”

“그리고 내가 기대하는 건 몸가짐 조심하는 거고.”

하얀은 치욕스러웠다. 자기 아들에게 꼬리 치지 말라는 말을 참 우아하게도 한다 싶었다.

“왜 대답이 없니?”

“잘 알겠습니다. 사모님.”

“그래. 그럼 첫 출근 축하한다.”

최 여사는 옆에 두었던 흰 봉투를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사모님.”

“너 지금 내 성의 무시하니?”

최 여사가 어이없다는 듯 봉투를 더 높이 들자 하얀은 어쩔 수 없이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래. 축하금이야. 어쨌든 내가 너 아기 때부터 봤잖니?”

최 여사가 웃으며 하는 말에 하얀은 기가 찼다.

‘사람 참 잘 부린다. 저런 건 타고나는 걸까, 어디서 배우는 걸까.’

생각해 보니 최 여사에게 축하금을 받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입학, 졸업 등 큰일이 있을 때마다 최 여사는 직접 혹은 어머니를 통해 하얀에게 봉투를 주었다. 하얀은 최 여사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 생각한 뒤, 곧 자신도 길든 건 아닌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박 비서?”

하얀이 고개를 들었다. 성빈이 재킷을 팔에 걸치고 커프스단추를 끼우며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긴 속눈썹 아래 옅은 쌍꺼풀진 눈이 그녀를 보고 반가운 빛을 띠었다.

“여기는 왜?”

성빈이 최 여사와 하얀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왜는 무슨 왜? 첫 출근이니 축하금 주려고 불렀지.”

최 여사가 웃으며 말하고 하얀은 어색하게 봉투를 조금 들어 보였다. 성빈은 최 여사에게 인사하고 하얀에게 나가자는 듯 눈짓했다. 대문 밖으로 나가니 성빈의 운전기사가 90도로 인사했다. 성빈과 나란히 뒷좌석에 앉은 하얀은 황급히 가방에 봉투를 넣고 핸드폰을 꺼내 성빈의 스케줄 표를 열었다.

“오늘 일정은….”

“그냥 가.”

“네?”

“9시부터 업무 시작이잖아? 편하게 가.”

“그래도 같이 타고 가는 이유가 있는데요.”

“그거야 같은 방향이니 타는 거지. 사무실 도착하면 거기서부터 일하면 돼.”

성빈은 그렇게 말하고 태블릿 PC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자신이 상상했던 첫 출근과 어느 하나같은 게 없자, 하얀은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힌 성빈이 보였다.

‘이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인상을 써도 잘생겼네.’

조금 각진 섬세한 턱은 남성미가 넘쳐흘렀고, 오뚝한 코, 아랫입술은 붉고 심지어 예쁘기까지 했다. 단정하게 올렸지만 풍성한 머리숱 때문인지 살짝 아래로 빠진 앞머리는 섹시했고, 그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스크롤을 내릴 때의 움직임은 우아했다. 하얀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지만, 성빈은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본부장님.”

김 기사가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었다. 성빈은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고 정문으로 향했다.

“어머, 본부장님이다!”

성빈과 하얀이 로비에 들어서자 출근하던 직원들 사이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매일 아침 훤칠한 키에 완벽한 비율의 그가 명품 슈트를 입고 출근할 때면 회사 로비는 그 순간 파리 컬렉션으로 바뀌었다. 성빈은 늘 그렇듯 반응 없이 엘리베이터로 곧장 향했다. 그 뒤를 따르는 하얀의 귀에 웅성거림이 들어왔다.

“저 여자야? 새로 온 비서?”

“그럴걸요? 근데 신입이 어떻게 바로 본부장님 비서로 갔대요?”

“그 몰라? 박 기사 딸이라잖아.”

“박 기사?”

“회장님 기사. 그 딸이래.”

“그게 이유가 돼요? 이사 딸도 아니고, 전무 딸도 아니고, 기사 딸이 뭐 저리 요직으로 가요?”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종살이도 해본 사람이 더 잘한다. 뭐 그런 거 아니겠어?”

하얀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했고 신입 사원 연수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녀가 지원한 부서는 비서실이 아니었지만 신 회장은 그녀를 성빈의 비서로 정했다.

“회장님이다!”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사람들은 홍해 갈라지듯 길을 텄다. 신 회장은 인도 공장 시찰을 목적으로 출국했다 아침에 귀국하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에 네 명의 사람이 탔다. 신 회장과 그의 비서인 김 이사, 성빈과 하얀이었다.

“첫 출근인가 보네요?”

김 이사가 하얀에게 묻자 신 회장은 그제야 하얀에게 시선을 줬다.

“열심히 일하거라.”

“네. 회장님.”

“여기 김 이사 본받아서 열심히 일해. 여자가 오래 일하며 이사 달려면 비서만 한 것도 없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신 회장이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말을 했고 김 이사는 그 말에 웃었다. 신 회장 비서로 20년 넘게 일한 그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JM에 아무도 없었다. 신 회장은 오래 본 하얀을 나름 배려한 걸지도 몰랐다. 하얀은 김 이사를 슬쩍 보았다. 옷과 가방, 구두, 시계까지 모두 명품인 중년 여성은 재벌 총수 옆에서도 당당해 보였다.

‘결혼 안 하셨다고 했지.’

하얀은 아버지에게 들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내 미래일까?’

하얀은 20년 후를 상상해 봤다. 재벌 총수가 된 성빈 옆에서 명품을 휘감고 당당히 서 있는 자신을.

‘나쁘지 않네.’

로비서 들었던 수군거림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2대째 종살이를 한다는 조롱을 눈빛 하나로 조용히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얀은 빨갛게 변하는 숫자를 올려다봤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최상층에서 한 칸 아래. 성빈과 하얀은 신 회장에게 인사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고 하얀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자, 성빈이 뒤를 돌았다.

“힘들어?”

“네? 아니요.”

“신고식이라고 생각해.”

아까 수군거림을 들었는지 성빈이 하얀에게 말했다.

“남 이야기니 쉽게 하는 말에 마음 쓰지 마.”

하얀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빈은 피식 웃은 뒤 걸음을 옮겼다.

***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일주일 내내 아침마다 수군거림이 있었고, 저녁에 퇴근할 때도 있었다.

‘언제까지 신고식인 거지?’

성빈이 점심 약속으로 외출하고 구내식당서 혼자 밥을 먹던 하얀은 생각했다.

‘어지간히들 할 일이 없거나, 아니면 내가 어지간히도 맘에 안 들거나, 둘 중 하나인가 보네.’

30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아버지의 월급은 다른 운전기사들과 비교하면 많았다. 물론 30년 일해 중역이 된 사람들의 월급과는 비교되지 않겠지만, 하얀의 아버지도 묵묵히 열심히 일했다.

‘운전기사나 비서나 지들이나 어차피 일해야 돈 버는 건 똑같잖아. 다 같이 JM에서 밥 벌어 먹고살면서 진짜 너무들 한다.’

동료가 없는 것도 그녀에게 안 좋았다. 신 회장의 비서실엔 김 이사를 필두로 여러 명이 있지만, 성빈의 비서는 아직 그녀뿐이었다. 성빈 없이 홀로 그녀가 지나갈 때면 사람들은 시선을 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기 앉아도 됩니까?”

30대 중반 정도의 남자 둘이 하얀에게 물었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붐비는 구내식당에서 합석은 당연한 일이었다.

“혼자 식사하시네요?”

말을 걸 거라 생각하지 않은 하얀은 국을 뜨다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네.”

“혼자 식사하기 싫지 않아요?”

왜 말을 걸지? 원래 이러나? 사원들끼리 말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만 능글맞게 웃으며 자신을 보는 눈빛이 맘에 들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혼자 드실 때 연락 주시면 언제든지 같이 먹어 드리겠습니다. 밥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남자는 능글맞은 시선을 던지며 퍽이나 재밌는 농담을 던졌다는 듯 자기들끼리 웃었다. 식당의 다른 사람들도 쳐다보기 시작하고 뒤에서 하는 수군거림을 넘어 대놓고 자신을 비웃자, 하얀의 얼굴은 굳었다.

“아, 화나셨어요? 저희는 친하게 지내면 좋을 거 같아서요.”

“무슨 대화가 이렇게 즐겁습니까?”

성빈이 테이블 위에 식판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식당은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사람들은 일제히 자기 식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들은 사색이 되어 성빈을 봤다. 하얀은 왜 갑자기 성빈이 이 자리에 나타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눈만 깜박였다. 성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남자들에게 다시 물었다.

“뭐가 이렇게 즐겁냐고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본부장님.”

남자 하나가 대답하자 성빈은 남자의 셔츠 주머니에 있던 사원증을 긴 손가락으로 슬쩍 뺐다. 성빈의 움직임은 느리고 우아했지만 당한 사람은 그가 칼이라도 목에 댄 것처럼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