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이유

마지막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 후, 밖으로 나서자 하늘엔 이슬비가 거리 곳곳을 적시고 있었다. ‘하얀색 가로등 불빛’과 간판 불빛 사이로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각자의 길을 걸어갔으며 한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탄 채로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조심스레 바삐 시야에서 벗어났다. 항상 비 내리는 날은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과 풍경에 눈을 떼지 못했고 유독 비 내리는 날은 코끝을 간지럼 피우는 냄새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가방 속에 있던 하얀 투명 우산을 펼쳐 집이 아닌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걸어가는 빗길은 매우 좋았고, 걸으며 떨어지는 우산 소리에 귓가는 한 곳에 집중되었다.

퉁 투투 퉁퉁.

빗방울 소리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슬비라서 소리는 귓가를 자극하지 않았지만, 투명 우산에 맺혀 있는 빗방울을 보면 마음을 위로해 주는 착각까지 들 정도다. 굵은 비가 내리는 날과 다르게 이슬비가 내리는 날에는 항상 버드나무 앞에서 잠시 가는 길을 멈춰 빗방울이 맺힌 투명 우산을 높게 들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본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버드나무를 반 정도 비추는데 연한 주황색 같기도 하고 진한 노란색 같기도 한 버드나무 이파리를 바라보면 맺혀 떨어지는 빗방울도 어느 순간 주황색이나 노란색 빗방울로 보이기까지 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어느덧 공원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비 오는 날에만 마주치는 익숙한 모습의 사람들도 있었다.

‘저 사람들도 비를 좋아해서 나오는 걸까? 시원함에 밖으로 나오는 걸까?’

한 손에 우산을 들고 같은 모습으로 산책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지만, 항상 ‘난 불행하다.’라는 짤막한 결론을 내곤 한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버릇처럼 공원 입구 왼쪽 길을 따라, 해가 뜨는 날에 많은 사람이 옹기종기 휴식을 취하는 정자가 있는데 그곳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빗소리나 풀냄새를 맡는다. 숨을 한번 들이쉰 후, 눈을 감고 고통이 시작되었던 기억들에 발을 디뎠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께서는 1년간 해외파견으로 집을 비우셨고 어머니 또한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시게 되었다. 어느덧 1년이 지나 아버지는 1년간의 해외파견을 끝으로 집으로 돌아오셨고 어머니는 계속 마트에서 일을 이어가시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성격이 내성적이셨는데 마트에서 일하시면서 성격의 변화가 크게 다가오셨고 아버지 또한 1년간의 해외파견 경험으로 그동안의 가치관이 달라지셨다. 문제는 성격과 가치관의 변화보다 1년간의 떨어짐이 두 분의 사이를 조각내고 있었다.

“현수 아빠, 그동안 고생 많았어.”

“고생은 무슨 그런데 당신 어디 일 다녀?”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성격이 내성적이었잖아. 당신이 가족과 떨어져서 벌어온 돈 쓰는 것도 미안하고 해서 생활비에 좀 보태고 성격도 고쳐볼 겸 마트에서 일하게 됐어.”

“우리 자주 연락은 못 했어도 전화했을 때 귀띔이라도 해줘야 할 거 아냐!”

“말하면 당신이 지금처럼 큰소리칠까 봐. 그래서 말 안 했어. 그게 그렇게 잘못한 일이야!”

“당신이 그렇게 일을 다니면 현수는 누가 챙겨? 현수 아직 저학년이야. 적어도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당신이 챙겨줘야 할 거 아냐?”

“요즘 애들 당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무능하지 않아. 현수도 오히려 당신이나 내가 잔소리하고 챙겨주는 것보단 지금처럼 자유로운 게 훨씬 나을 걸. 그리고 당신 월급 우리 3명, 생활하기엔 빠듯한 거 당신도 알잖아.”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당신이 월급통장 가지고 있어서 더 잘 알잖아. 사자 들어가는 직업처럼 많이 벌지는 못해도 우리 가족 충분히 생활할 수 있고 부족함 없이 살아가잖아. 뭐 얼마나 더 벌어 와야 하는데? 현수 학교 다녀오기 전까지 친구들이랑 식사하든 카페를 가든 그런 걸로 터치 안 해. 파견 생활하면서 보니까 각자의 생활이 있고 그 시간 당신 방해하고 싶진 않아. 근데 현수 챙겨주는 게 그렇게 싫어? 그게 그렇게 힘들어?”

항상 부모님 싸움에 주된 원인이자 해결되지 않는 숙제였다.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된 싸움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친구와 방학 숙제를 미리 끝내려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생각보다 빨리 집으로 발걸음을 나선 게 화근이었다. 대문 앞에서 부모님의 대화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현수 엄마, 그래. 현수 혼자 돌보기 힘들었다는 점 내가 몰라서 미안하고 이해할게. 그래서 현수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주변에서 이혼 많이 하기도 하고 텔레비전에서도 많이 나오잖아. 근데 난 이혼하기 싫어. 이혼이라는 이 단어가 너무 무서워. 아니, 밖에서 그 시선들 난 무시 못 할 거 같아. 현수 당신 어머니나 형님한테 맡기는 거 어때? 형님 애들 다 커서 준수 빼놓고 독립했잖아.”

“무슨 애를 어머니나 형님한테 맡겨? 현수가 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솔직히 말해봐! 당신은 현수 짐이라고 생각 안 해? 그러면 현수 당신이 키울 수 있어?”

“혼자 키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무슨 애를 짐이라고 생각을 해….”

“어물쩍 넘기려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현수 아빠 당신은 현수 어떻게 생각해?”

“우리 지금 해결도 못 하는 상황에선 현수도 상처받고 당신한테도 짐이겠지….”

“봐봐. 당신도 크게 다르지 않잖아. 현수 아빠 이혼은 하지 말고 우리 당분간 따로 살자. 그리고 현수는 우리 더 상의해보고 결정하자. 그리고 현수한테 이야기 하지 마. 결정되면 현수에게 상처 되지 않게 이야기해주게.”

“알았어. 잠시 나갔다 올게….”

듣지 말아야 했다. 아니 싸우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내려와야 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에 오른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꽉’ 쥔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늘엔 회색 구름이 가득했고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찬 바람이 불었으며 금방이라도 소나기나 큰비가 내릴 거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갔고 계속 달려서 도착한 곳이 바로 공원이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그 당시엔 정자가 없었고 ‘주황색 가로등 불빛’만 있던 그곳엔 이제 인적이 드문 곳에는 ‘하얀색 가로등 불빛’이 생겼다는 점 말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인적이 드문 나무 밑 의자에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에서 한두 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오른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의자에 앉은 채로 펼쳤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변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주황색 가로등 불빛’만이 반겼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고 빗방울의 소리는 평소보다 작았으며 나무 밑에서 우산을 펼친 탓에 굵은 빗소리가 아닌 가는 빗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투 퉁 투투투퉁.

계속 자리에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았다. 아니 아무도 듣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울고 싶으면 마음껏 소리 내서 울어도 된다고 토닥토닥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 지금은 조금 힘들 뿐이야. 울고 싶으면 얼마든지 울어. 울음소리 아무도 듣지 못하니까 마음껏 울어.’

‘…’

‘언제든지 옆에 있어 줄 테니까 힘들 때마다 찾아주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니 아버지 손을 잡은 채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는 친구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부러워서? 억울해서? 아니면 화가 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 찢어질 듯한 소리로 목 놓아 크게 울었다. 비가 그치기 전까지….

‘엉어 어엉엉.’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전학을 가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운 큰아버지 댁에서 중학교 입학 전까지 살게 되었고 중학교 입학 후에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원룸에 방을 얻어 지내게 되었다. 목 놓아 크게 울었던 그 일이 있었던 후, 외롭고 힘들거나 혹은 고민이 있을 때면 비가 내리는 그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울지는 않더라도 빗길을 걷다 보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았고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감았던 눈을 떴다. 아무도 없을 거 같았던 그곳에 예진이가 앉아 있었다.

# 둘. 비가 내려준 선물

아무도 없을 거 같았던 그곳에 예진이가 마주 앉아 멀뚱히 쳐다보는 이 상황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학원에서 알게 된 사이라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였기에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예진은 먼저 입술을 뗐다.

“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사람이 와도 전혀 몰라.”

머리가 멍하고 하얗게 돼버리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내일 주말이잖아. 주말에 뭐 하고 놀까? 생각 좀 하고 있었어.”

“하아….”

짧은 탄식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했고 비가 내리는 늦은 저녁 시간에 혼자가 아닌 둘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오른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살짝 몸을 휘감듯이 스쳐 지나가더니 곧, 거센 비바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쏟아지는 상황이기에 정자 바깥쪽에 앉을 수 없었고 덜 들어오는 중심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예진이가 앉아 있는 맞은편을 바라보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비를 맞고 있었다. 비를 맞는 모습이 너무 놀라 곁에 다가가 말을 내뱉었다.

“야, 너 뭐해? 비 맞잖아. 안으로 들어와.”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뭔가 잘못된 거 같아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얼굴을 바라봤다. 예진은 울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모습에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손수건을 왼손에 건네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울음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울음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고 왼손에 건네준 손수건으로 눈과 볼을 살포시 닦더니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