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다섯. 꿰매어진 바늘

감정의 변화는 순식간에 다가왔다. 언제 떠나갈지도 모른 채 미워하는 마음은 점점 커졌지만, 수아의 아픈 목소리에 미워하는 마음은 금세 사라졌고 걱정스러움이 자리 잡았다. 감정의 이중성이 다가올 때마다 당황스러웠고 답답했다. 곧, 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건넸다.

“아프다면서… 지금은 좀 어때?”

“누구세요?”

“현… 수….”

“응? 미안… 약 먹고 자고 있었어.”

“전화해서 깨운 거였네… 미안해… 좀 더 자.”

“괜찮아. 저기 현수야….”

“아니야.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 아니면 언제 대화해. 현수야….”

“응…?”

“의심해서 미안해….”

“….”

“많이 화나고 서운했지…?”

“화도 나고 서운하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그 상황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한 사람 때려주고 싶기도 했고….”

“미안해… 처음에는 넘겼는데 주위에서 계속 듣다 보니까 의심하는 마음이 생겨버렸어… 다시는 안 그럴게.”

“지금이라도 믿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누가 그런 소리 하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나한테 먼저 말해. 알았지?”

“응, 알았어. 주말엔 뭐해?”

“이제 시험공부 해야지. 우리 기말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맞다. 기말 곧 다가오네. 이번 주 말고 다음 주부터 우리 저번처럼 같이 도서관 갈래?”

“그러자. 같이 가서 공부하고 밥도 먹고.”

“알았어. 그럼 잘 자.”

“너도… 이불 꼭 덮고 자고, 약도 챙겨 먹고.”

“알았어, 월요일에 봐요.”

“응, 아침에 데리러 갈게.”

혼란스러움과 뭔가 찌르는 듯한 고통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오히려 마음은 편안해졌고 굳어있던 얼굴의 근육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풀어졌다. 밤하늘엔 구름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온 거리를 밝히고 있었고 거리엔 두 손 잡으며 맞춰 거니는 중년 부부의 모습에 시선이 고정됐다. 얼굴엔 미소를 머금었으며 모든 고통과 답답함이 사라지자 기지개를 힘차게 켰다. 성당의 종소리가 온 거리에 울려 퍼졌고 하루가 마무리되어가는 시간 속에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밝은 햇살과 주황색 하늘은 한 주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거리엔 출근하는 사람과 등교하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수아의 집 앞에 이르자, 두툼한 하얀 마스크를 착용한 수아가 다가왔다.

“안녕.”

어색한 인사였고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왜 웃어? 나름 용기 내서 먼저 인사한 건데….”

“어색한 인사였잖아. 그래서 웃었지.”

“치, 뭐야! 넌 인사 안 해줘?”

“보고 싶었어.”

“나도… 많이.”

“약은 챙겨왔어?”

“당연하지. 근데 준영이는?”

“모르겠는데 혜원이랑 같이 오려고 그러나, 좀 늦네.”

“함 전화해볼까?”

“잠만.”

두툼한 옷을 입었지만, 수아는 추위를 많이 느끼고 있었고 그런 모습에 가방에 있는 보온병을 꺼내 따뜻한 율무차 한 잔을 건네주었다. 온몸이 ‘사르르’ 녹아내렸는지 움츠러들었던 몸은 곧게 퍼졌고 곧이어, 준영은 자전거를 탄 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왜 이리 늦게 와.”

“화장실에서 잤어.”

“미친x!”

“와, 어떻게 월요일 아침부터 욕을 하냐.”

“수아 많이 추워하니까 그러지!”

“나도 춥거든. 여친 엄청 챙기네 진짜, 서러워서 같이 다닐 수 있겠냐. 나 먼저 갈래. 나 삐쳤어. 흥!”

“우웩!”

“준영이 뭐야. 혜원이한테 말해야겠다.”

“하지 마.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뭐야, 그 말투는?”

“뭐긴 나름의 애교? 그럼 말 안 하는 거다! 여튼 몸은 좀 어때?”

“약 먹고 계속 쉬니까 많이 나아졌어.”

“다행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전거를 놓고 올걸.”

“왜?”

“난 너희 아직도 사과 안 했을 거로 생각했지.”

“어떻게 그러냐. 그리고 이미 오해 풀렸는데.”

“잘했어, 너도 수아도.”

“잘하긴… 내가 실수했는데….”

“그건 과거 일이잖아. 우리 이제 가볼까? 교실 가서 난로 앞에서 몸 좀 녹여야지!”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자 곧이어, 검은색 승용차가 멈춰 섰다. 조금 늦게 일어난 탓에 근처까지 부모님께서 데려다주셨고 혜원의 모습이 보이자 준영은 곧장 옆에 다가가 말을 건넸다.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쓰며 수아 발걸음에 맞춰 걷기 시작했고 그런 모습에 우리의 어색함은 학교에 다가갈수록 사라져 갔다.

“수아야.”

“오랜만에 본 거 같다.”

“몸은 어때 괜찮아?”

“응, 많이 좋아졌어.”

교실로 들어오자 한 명 두 명 다가오더니 수아와 대화를 나누었다. 항상 같이 식사하던 멤버들은 우리에게 다가오질 못했고 끝까지 사과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떠났다. 그런 모습에 웃고 있던 수아와 혜원은 순간 정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거렸고 준영의 입에선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모든 건 사건이 있기 전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오전 수업이 끝이 나고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께서는 무슨 말을 하시려는 듯 이동하지 않으셨고 식사 당번들만이 자리를 비우자 곧, 말을 뱉으셨다.

“이제 곧 기말고사가 다가왔어. 다들 알고 있지?”

“네….”

대부분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주변에서는 한숨 섞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다들 왜 그래? 너희 중간고사 잘 봐서 얼마나 기뻤다고. 떨어지지 말고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떨어지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노력하자. 후회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알았어?”

“네.”

축져진 어깨와 풀이 죽은 목소리가 안쓰러워 보이셨는지 위로가 되는 말을 이어가셨다. 교실을 떠나실 줄 알았지만, 다시 한 번 말을 뱉으셨다.

“지금 자리 보면 식사 당번 말고 3명 자리가 비어 있어. 다들 알고 있어?”

주변에서는 어제와 같이 수군거림이 일어났다. 그 수군거림은 한 곳에서만 아닌 이곳저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조용! 지금 자리 비운 인원이 어제 한 일 다들 알고 있을 거야. 물론 잘못했고 상처를 줬고 크게 실망하기도 했어. 그렇다고 해서 너희가 그 인원 없는 사람 취급하고 욕을 하면 안 되지. 용서하기 힘들겠지. 그래도 같은 반이고 계속 얼굴 볼 친구들인데 어떻게 하겠어? 품고 가야지. 너희가 다가가기 힘들다면 그 인원들이 다가왔을 때 전과 같이 대해줬으면 해. 식사 맛있게 하고 수아, 현수, 혜원, 준영 네 명 과학실로 와. 이상.”

교실을 떠나셨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조용했다. 분위기는 ‘축’ 가라앉았으며 전과 같이 곳곳에서 작은 소리로 수군거림이 계속 나타났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밥과 반찬 통이 교실로 들어오자 금세 사라졌다. 시끄럽고 생전 겪고 싶지 않은 난리 통이 다시 펼쳐졌고 우리는 준영의 자리에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곧, 혜원은 입술을 뗐다.

“우리 뭐 실수 한 거 있어?”

“혜원이 넌 처음 가지?”

“응, 꼭 뭐 잘못해서 가는 거 같다.”

“뭐라고 하실지 대충 알겠는데.”

“혼내실 거 같아?”

“아니 전혀.”

“그럼?”

“용서하면 안 되겠냐고 뭐, 그런 식으로 말해주시겠지.”

“너랑 수아는 당사자잖아. 용서할 수 있어?”

“전과 같이 돌아가긴 힘들어도 사과한다면 이해해줘야지.”

“난 잘 모르겠어… 친했던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나도….”

식사를 잠시 멈춘 채, 혜원과 수아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자, 지켜보던 준영은 말을 건넸다.

“쌤이 우리 감정 모르실까? 다 아셔. 아시는데 예상하셨던 것과는 다르게 나타나니까, 그리고 저쪽 자리 봐봐. 가방도 없어. 3명 다….”

“어디 간 거야? 조퇴한 거야?”

“그거야 모르지. 식사하고 가면 쌤이 말해 주실 거 같은데 아마도.”

“그만 이야기하자. 이러다 탈 나겠어.”

전과 같은 혼란스러움과 가슴 떨림은 곁에 머물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감정의 기복은 없었고 편안했으며 식사를 마치자, 우리는 과학실로 이동했다. 문은 잠겨 있었고 그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자 종이컵과 티를 가지시곤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곧, 선생님께서는 입술을 떼셨다.

“식사는 맛있게들 했어?”

“네.”

“대답은 또 잘해. 선생님이 불렀다고 긴장하는 거 같은데?”

“조금이요.”

“긴장할 필요 없어. 너희가 뭐 좋아할지 몰라서 핫 초코 가져왔으니까 마시면서 대화하자.”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잔을 들자, 우리도 핫 초코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보시던 선생님께서는 소리 내 웃으셨고 우리도 일순간 긴장이 풀려 웃어 버렸다.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과학실 안은 모처럼 웃음소리가 가득 퍼졌고 다시 한 번 선생님께서는 말을 건네셨다.

“수아 몸은 어때? 괜찮아?”

“콧물 때문에 힘들긴 한데, 약 먹으니까 버틸만해요.”

“수아 태권도도 잘하고 해서 자기관리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아파서 결석까지 하고 많이 걱정했잖아.”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거 없어. 혹시 현수 때문에 아프거나 괴로우면 선생님한테 말해. 대신 혼내줄게.”

온기를 느끼려 양손에 종이컵을 들고 있던 수아는 선생님의 말씀에 입가에 미소를 살며시 띠며 입술을 뗐다.

“네? 현수 많이 착해요.”

지켜보고 있던 혜원은 오른쪽 팔로 살짝 수아의 팔을 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선생님께서는 다시 한 번 웃으셨고 수아와 혜원은 빨개진 얼굴로 수줍게 미소를 띠었다. 준영은 무슨 영문에 웃는지 몰라 어리둥절했고 때마침 과학실 안의 온풍기가 작동되자 따뜻한 온기가 몸 전체를 감싸 찬기를 녹아주었다. 몸이 점점 나른해지자 선생님께서는 잠시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시며 말을 건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