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은하수 제과점

스무 명은 넘는 사람들이 각자 자리에서 하얀 위생복을 입고 작업하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여자는 어안이 벙벙해서 이리저리 둘러봤다.

빵 반죽을 주무르는 사람, 빵 팬을 오븐에 넣는 사람, 식힌 빵을 칼로 썰고 있는 사람까지.

모두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한 남자가 빵에 크림을 넣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황은하, 설명해 줄게.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그래, 난 누군가 이렇게 말해 주길 기다렸어. 그런데 당신은 싫어.

당신은 8년 전에 내 마음을 거절한 남자잖아.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져서는 어째서 내 옆에서 함께 일을 하는 거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다른 위치에서 각자 제자리에서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분명히 이 남자가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

벽에 걸린 2019년 9월 일정표를 한 여자가 체크하고 있었다. 서른한 개의 칸 중 17일 칸에 붉은 칠판펜으로 사각형을 그리면서 여자는 말했다. 그 목소리는 누구라도 기분 좋게 할 것처럼 밝았다.

“매니저님, 오늘 단팥 크림빵 100개, 늘 주문하셨던 노인 복지관입니다.”

“황은하 사장님, 필요한 일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섯 명의 직원을 한 번 훑었다. 모두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 그중 한 명, 재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장난스레 속삭였다.

“오늘 고백 데이잖아, 민정이한테 고백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데이트해야지?”

재호는 순진한 표정으로 얼굴이 발그스름해져서 괜히 발끈했다.

“제가 알아서 합니다! 사장님도 이번 크리스마스 때에는 혼자 보내지 마시죠.”

“나는 뭐. 그때도 케이크나 만들고 있지 않을까? 축하하며 즐거워할 사람들을 위해.”

어깨를 으쓱하고 은하는 시원하게 웃어넘겼다. 다른 직원들도 은하의 자폭 발언 덕분에 유쾌해졌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속 은하수 제과의 매장 전등이 켜졌다. 갓 구운 빵들이 식힘망에 가지런히 놓여서 걸쇠에 걸린다.

50가지나 되는 빵과 케이크를 만드는 데 직원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일한다. 하지만 대표 황은하가 직원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노력도 빠지지 않았다.

“여기 옛날 그 은하수 제과 맞아요?”

중년 여성 고객이 묻자 은하는 얼른 미소를 띠며 답했다.

“네, 원래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가 경상남도 양산에서 본점 운영하셨고요. 부모님이 가맹점을 전국에 여럿 내셨었죠. 이제 제가 그 비법을 전수하여서 3년째 열심히 운영하고 있습니다.”

“궁금해서 들러봤는데 맞네. 우리 가족이 옛날에 여기 빵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고객님은 추억에 잠긴 듯한 얼굴로 진열된 빵을 집게로 고르기 시작했다.

좋아, 고객님 반응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만족스러웠다.

상냥한 얼굴로 은하가 얼른 덧붙여 말했다.

“드셔 보시고 어떠셨는지 말씀하러 매장에 또 찾아주세요.”

이렇게 옛 은하수 제과를 찾는 고객들은 제법 많았다. 그때마다 웃으며 답했지만, 절대 이 사항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맡은 뒤로는 한 번 쫄딱 망했었죠.’

황은하는 바쁠 땐 판매 직원을 돕고 평소에는 주방에서 빵과 케이크를 만들곤 했다. 한창 바쁘게 반죽을 만지던 은하는 낡은 레시피 북을 꺼냈다.

오늘 주문하신 노인 복지관 분들은 특히나 할머니의 옛 손맛을 그리워하던 분들이었다.

은하는 단팥 크림빵 레시피를 보지 않아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할머니의 빵과 가장 비슷하다는 말을 꼭 듣고 싶었기에, 늘 이렇게 레시피를 확인하곤 했다.

“공장장님, 크림은 제가 만들어 놓을게요.”

“예, 사장님 뜻대로.”

할머니의 제과점을 잇겠다고 마음먹은 건 애석하게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그 때문에 은하는 혼자 배우고 알아내야 했다.

“사장님,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매장 팔 생각 없냐는 전화, 맞죠?”

직원 민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는 진절머리 난 듯 내뱉었다.

“그냥 끊어요.”

은하수 제과는 대단히 넓은 매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버스 정류장 그리고 지하철역이 인접해 있는 상권에 있는 빵집이라면 누구든 탐낼 수 있는 곳이다.

어느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입점할 필수 조건으로 ‘건널목’을 꼽는다고 한다. 신호를 기다리는 고객들의 시선을 한 번 더 끌 수 있으니까. 그 조건 역시 은하수 제과 앞에 있었다.

수화기를 들고 있던 민정이 머뭇거리며 다시 은하에게 알렸다.

“이번엔 꼭 사장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겠다고, 아주 마음에 드는 제안일 거라고 하시는데요.”

이미 귀에 바게트라도 박은 듯 듣지 못한 은하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주문받은 빵의 마지막 작업을 서두를 뿐이었다.

연한 노란색 크림을 빵에 주입하자 방긋했던 빵은 더 봉긋해졌다.

크림은 적정량을 넣는 게 중요하다.

적은 양을 넣으면 단팥빵과 다름없고, 많은 양을 넣으면 빵은 다 터져 버리기 일쑤였다.

열중하고 있느라 은하는 직원의 마지막 말도 다 듣지 못했다.

“제안한 의뢰인이 직접 매장에 지금 와서 설명하겠다고 하시네요.”

*

오후가 되자 미리 약속한 대로 빵을 주문한 고객이 찾아와서 은하에게 말했다.

“단팥 크림빵 100개 주문했는데요.”

“네, 선결제하셨고요. 여기 있습니다.”

종이상자에 차곡차곡 담은 빵을 주문한 사람에 보여주었다. 그리고 은하는 단단히 테이프로 봉했다.

“늘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고객과 눈을 맞추며 웃는 은하의 표정에 비해, 고객은 그렇지 못했다.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던 고객은 조심스레 말했다.

“여기 다시 오픈할 때부터 주문하긴 했는데요. 이제는 이 근처 블루밍 브레드로 납품받는 곳을 옮길까 하고 있어요.”

“블루밍 브레드요?”

국내 프랜차이즈 제과업계에서 5년째 소비자 대상 1위를 연속으로 하는 브랜드였다. 은하가 놀라서 묻자 고객은 머뭇머뭇 대답했다.

“네, 요즘 거기 상시로 할인을 많이 하더라고요. 저희가 내년부터 예산이 조금 적어질 것 같아서요. 알아주는 브랜드이기도 하고요.”

웃고 있는 은하의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이건 그냥 주문처를 옮기겠다는 통보였다.

돌아서려는 고객을 붙잡기 위해 뭐든 혜택을 더 제공해야 했다.

마음을 굳게 먹은 듯 은하는 입꼬리를 더욱 올리고 말했다.

“저희도 싸게 해드리고 서비스도 많이 드렸는데. 혹시 단가 얼마에 맞추셨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그게.”

복지관 고객은 어색하게 웃으며 빵 상자를 들고 나갔다. 블루밍 브레드에서 해주겠다고 한 단가는 은하수 제과에서 맞춰 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블루밍 브레드는 대기업 BNB 그룹에서 효율적인 공정을 위해 작업을 최소화한 오랜 기술로 똘똘 뭉친 프랜차이즈 제과점 브랜드이기에.

열 명 이상 주방에서 일해야만 만들 수 있는 제품량을 한두 명이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당연히 빵 단가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은하는 한 명의 고객이 떠나갔다는 생각에 한숨을 푹 쉬었다.

안 그래도 처음과는 달리 옛 은하수 제과와 빵 맛이 다르다는 말이 제법 들렸다.

“여기 자체로도 아주 맛있는데 이런 말 하기 미안하네요.”

“추억이 담겨서 더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들을 때마다 은하는 ‘더 노력하겠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옛 맛을 되살릴 수 있을까?

조부모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부모님은 은하가 대학 입학식 날 사라지셨는데.

만약에 엄마랑 아빠도 프랜차이즈 경영에 성공했다면. 그랬다면 할머니의 빵 맛 정도는 어디든지 맛볼 수 있었겠지?

돌아가신 할머니의 혼이라도 뵙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편히 잠드신 분을 무슨 서로 만나서 비법을 물어보겠냐.”

은하는 두 번째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출입문 풍경이 울리며 한 남자가 매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갖춰 입었으며 머리도 말끔히 올린, 이목구비 또렷한 남자가 넓은 보폭으로 이쪽을 걸어오고 있었다.

턱을 괴며 생각에 빠져 있던 은하는 1초 만에 자세를 곧게 폈다.

“어서 오세요. 은하수 제과입니다.”

인사하는데 말끝이 흔들렸다. 28년 살아오면서 저렇게 잘생기고 키 큰 사람은 처음……은 아니었다.

한 사람만 빼고, 처음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한 사람이었다. 그를 알아본 순간 은하는 자동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편 남자는 미소 지을 뿐이었다.

“황은하, 반갑다.”

생크림을 머금은 듯 부드럽고 낮은 음색을 내는 이 남자. 은하가 8년 전 만났던 대학교 선배였다. 홀린 듯 은하는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서태주 선배…….”

“8년 만이지?”

눈을 접으며 웃는 그의 표정도 그대로다. 아니, 더 세련되고 남성미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멍하니 보던 은하는 얼른 복화술 하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