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벗기는 왜 벗어

앞서 걷던 태주 선배가 걸음을 멈추니 은하도 더는 그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무슨 일로 멈췄을까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거친 바람이 불어왔고 그 와중에 남학생 한 명과 부딪혀 버렸다.

반사적으로 은하는 “아!” 소리를 내버렸다.

차와 부딪힐 뻔하지 않나, 태주에게 안기지를 않나, 이번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 치이기까지 하다니.

오늘이 ‘접촉 사고’의 날일인지도 모른다고 은하가 생각할 무렵이었다.

“죄송합니다.”

옆에서 곧바로 사과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성의 목소리와 소년의 목소리 그사이 어딘가의 목소리.

부딪히기만 했고 아프지는 않았기 때문에, 은하도 곧바로 웃어 보이며 답했다.

“괜찮아요.”

방금의 접촉 순간에 가벼운 플라스틱 조각의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었다.

은하는 얼른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들었다.

주워 든 것은 학교 명찰이었고 ‘박민석’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어, 이거…….”

은하가 명찰을 돌려주려고 뻗었던 손을 뻗기도 전에 상대방이 홱 빼앗아 가 버렸다.

그녀의 빈손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고마워요.”라고 가볍게 말하던 청년의 목소리는 산바람에 흩어질 뿐이었다.

‘예의가 바른 건지 무례한 건지 모르겠네.’

은하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 청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건 은하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청년들끼리 하는 대화였다.

“야, 너 또 은하수 제과 갈 거야?”

“어.”

“하여튼. 너는 그렇게 좋은 집에 살면서 참 은근 한결같은 면이 있어.”

청년들의 웃음 사이로 은하는 고개를 빳빳하게 굳혀 버렸다. 그 광경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남자가 있었다. 태주가 고요하게 물었다.

“너 여기서 뭐하냐니까.”

아쉬워하며 은하는 제멋대로 답했다.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으므로 말끝을 올려 버렸다.

“음, 양산 관광이요?”

“……혼자서?”

약간의 침묵이 오갔지만, 그는 대충 둘러댄 말에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관광 가이드 있어요, 저기.”

은하는 그나마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주는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추모 공원에 관광을 왔다고?”

‘아차, 여기 그냥 산이 아니었지.’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바보스러운 말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은하도 한 번씩 왔던 곳이므로 모르던 곳이 아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임기응변을 발휘해서 답했다.

“요 근처 절에요. 산에서 보는 경치가 그렇게 절경이라던데요.”

“됐어. 그만해.”

태주의 목소리가 바람에 날려서 가볍게 들렸다.

그녀가 거짓말했다는 사실에 대해, 선배가 적어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은하는 말없이 멋쩍게 웃었다.

그 멋쩍은 감정을 한 번에 날리는 제안이 뒤이어 은하의 귀에 들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너도 같이 갈래?”

그건 차가워진 바람을 훈훈한 공기로 바꿔 줄 법한 따뜻한 목소리였다.

*

태주 선배가 갑작스레 제의해 버리는 바람에 이끌리듯 추모 공원 안으로 갔다가, 지금 막 나오는 길이었다.

잔잔한 표정으로 은하를 보며 태주가 말했다.

“관광 가이드 있다며, 따라가야지? 난 버스 때가 다 되어서 먼저 갈게. 나중에 회식 때 보자.”

그렇게 말하며 태주는 낮에 은하를 구해 주던 때처럼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먼저 가버렸다.

은하만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었다. 분명히 거짓말했다는 걸 다 들킨 줄 알았다.

그런데 저 눈치 빠른 남자에게, 아무렇게 둘러댄 말을 들키지 않았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 진짜 저렇게 가는 거야?’

입을 다물 줄 모르게 그의 행동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던 은하.

그런 그녀에게 태주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안 따라와, 거짓말쟁이? 이게 마지막 버스야.”

소리 내 웃지만 않을 뿐이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 완전히 웃음기가 보였다.

누가 봐도 알면서도 놀리는 게 역력한 표정. 역시 다 알았잖아!

그래도 거짓말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태주 선배가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는 것에 이의를 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빨리 와.”

태주는 한 번 더 재촉했다. 이번에는 거짓말쟁이라고도 하지 않았고 장난기가 있지도 않았다.

그저 은하에게로 손을 내밀 뿐이었다.

추모하는 시간 동안 바람 불 때마다 산 공기가 은하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줄곧 추워했기에 은하는 온기를 찾는 본능으로, 태주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척 정면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선배도 추워요?”

“아니. 너 손은 왜 이렇게 차가운 거야?”

태주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고는 잡은 손을 떼지 않았다. 남자의 손은 너무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데 그 웃음소리 때문인지, 얼굴은 뜨거워졌다. 기분 좋게 느껴질 정도였다.

은하는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답했다.

“수족냉증이 조금 있어요. 그래도 안 잡는 거보다는 잡는 게 덜 추울걸요.”

“그래, 네 말 맞아.”

체념하는 어조였지만, 그의 표정은 산뜻했다.

내려가는 버스에서 은하와 태주는 나란히 앉았다. 괜히 거리를 두면서 뒤로 돌아보는 바람에 멀미를 앓는 짓 같은 건 그녀가 더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안도하며 은하는 옆좌석 앉은 채로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네가 민망할 테니까, 버스에서 내린 후부터 알았다고 할게.”

선심 쓰듯 하는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하는 재차 물었다.

“하, 거참. 진짜 언제부터 알았는데요?”

태주가 이번에는 대답 대신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벗기는 왜 벗어, 대답이나 하지…….’

그렇게 생각할 무렵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온기와 포근함이 어깨에서 느껴졌다.

태주의 체온이 담긴 재킷을 은하의 몸 위로 둘러 왔다. 그는 꼼꼼히 은하의 어깨를 여며 준 후 말했다.

“꽤 추워? 뜬금없이 이곳에 오자고 하는 바람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왔을 테니까.”

늘 활력 있던 태주는 조금 피곤이 묻어나 보였다.

‘이곳에 오자고……?’

피곤해서 태주가 헷갈려서 말한 게 아닌가, 은하가 의아해할 때쯤이었다.

“잘못 말한 거 아니야.”

눈 사이를 가볍게 지압하며 그가 이어 말했다.

“우체국으로 배달을 하러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네가 날 따라오고 있었다는 걸 어느 정도 추측은 하고 있었지.”

“생각보다 더 빨리 알고 있었네요.”

“그러니까 너랑 지금까지 동행하는 거로 생각하고 있었어. 혼자 부딪히고 쫄래쫄래 쫓아오는 모습을 모른 척하느라 힘들었을 뿐, 재밌긴 했지.”

태주가 정말 즐거웠던 듯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감정 소모해 가며 자취를 숨기려고 했던 지난 시간은 헛된 거였다. 억울함이 목 끝까지 차오를 즈음에 태주가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물었다.

“여자 만난다고 했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실망했겠네? 그것도 아버지라는 임자가 있는, 여자여서 말이야.”

태주 선배가 이곳 추모 공원에 온 이유는 다름 아닌 부모님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태주 선배와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나까지 부모님 안식처에서 인사드려도 되나 싶었다.

대학교 선후배 관계 혹은 3주가량 연인이었던 관계. 우연히 과거로 함께 와버린 시간 이동 동행자.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함께 일을 하는 직장 동료인 관계.

그렇게 다양한 단어로 수식할 수 있는 관계이긴 하지만, 태주 선배의 부모님을 추모하기에는 모두 모호한 관계였다.

여전히 앞으로도 지속할 수 있을지는 확언할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래도 태주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부모님이 나 감싸 주셔서 난 살았어. 그러니까 마치 네가 아픈 것처럼 울지 않아도 돼.”

그때는 다른 일 때문에 울었지만, 선배가 했던 말 몸속의 슬픔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태주의 부모님에게 공손히 손을 모으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태주 선배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만든 음식이라도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고요.’

그렇게 빌고도 약간은 아쉬웠다. 은하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래도 기왕이면 아드님이 온전히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주세요.’

지금은 바로 그 ‘교통사고 트라우마’ 때문에 우리의 계약이 성립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전까지 이 계약도 끝일 거고, 2007년 속 잠시나마 거리를 좁혔던 이 시간도 끝일인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태주 선배가 인간의 기본 감각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빌어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추모 공원 그때를 떠올리다, 이제 은하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