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공주님 오셨네. 정말 얼굴 한 번 보기 힘드네.”'“죄송해요.”'전혀 미안한 맘이 없었지만, 말이라도 해야 별 탈 없겠다 싶어서 일단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미 안주는 모두 먹어치운 채, 술만 널브러져 있었다. '“늦었으니까 벌주로 한 잔 받아.”'태현 선배가 혜린이 앞으로 잔을 따라 주었다. '“밥부터 먹고요. 아줌마, 여기 공깃밥 주세요.”'저녁도 안 먹고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뛴 혜린이였다. 이대로 술부터 먼저 마시면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너 왜 이리 건방져?”'“네?”'“니가 그렇게 잘났어?”'이런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있나. 자신을 워낙 드러내지 않으려는 태도에 간혹 자신을 오만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오해였다. 혜린은 단지 너무도 배가 고팠고, 그래서 밥을 시킨 것뿐이다. 그런데 잘났냐고 묻다니. '“마셔.”'혜린은 술잔을 노려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저녁도 못 먹고 아르바이트 세 개 뛰었어요. 지금 밥 안 먹고 술 마시면 쓰러질지도 몰라요.”'“이런, 젠장! 확!”'혜린은 얼굴에 차가운 것이 뿌려지는 것을 느꼈다. 태현 선배가 얼굴에 술잔을 끼얹은 것이다.'“지금 뭐하시는 거예요?”'흡!'그 순간 혜린의 얼굴이 잡아당겨졌다. 그리고 거친 키스가 시작됐다. 숨 막히게 조이는 힘에 애써 거부해도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싫다. 정말 싫다. 탐욕스러운 입술은 혜린의 입술을 빠는 데 그치지 않았다. 혀를 뾰족하게 세워 혜린의 여린 입안으로 침투해가려고 했다. 죽어도 허용할 수 없기에 입을 꼭 다물고 버티는데, 거친 손으로 턱이 잡히고 억지로 입을 벌려지려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때, 갑자기 태현 선배가 쓰러졌다. '“이 새끼 취했네.”'“헉……헉…….”'겨우 애써 숨을 몰아쉬는데, 손이 잡혔다.'“나가자.”'혜린은 잡힌 손을 탁! 뿌리쳤다. 이 사람은 누구야?'“훗.”'픽, 하고 웃더니 혜린의 팔을 잡고 끈다. 혜린은 움직일 수 없었다. 태현 선배하고는 분위기 자체가 다른 사람이다. 머리가 짧은 것을 보니 막 제대한 것 같기도 한데……도대체 누구지?'“일단 나가자.”'“왜 내가 나가야 하는 거죠?”'“너 지금 위험해. 몰라?”'그때 혜린에게 술에 취한 선배들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 웃고 떠들던 선배들이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음흉한 수컷의 눈빛이었다. 저런 눈빛 본 적이 있다. 저럴 때는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으나, 앞의 남자도 썩 믿음은 가지 않았다.'“오우, 노! 난 생각 없으니까 그런 눈초리는 하지 마.”'남자가 다시 혜린의 팔을 끌었다.'“나가자.”'일단 이곳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혜린은 남자를 따라 나갔다. 혜린의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이 따가웠다.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 줄은 모르겠으나, 선배들이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것으로 보아 꽤 영향력이 있는 사람 같았다.'“소문대로네. 궁금했는데.”'“소문이요?”'“크크. 나도 보기 전엔 믿지 못했어.”'“무슨 소리예요?”'“무슨 소린지 몰라?”'혜린은 짐작이 갔다. 그래, 또 그거다. 도대체 왜 남자들은 자신만 보면 섹스하지 못해 환장한 것처럼 되는 걸까? 내 무엇이 그렇게 문제일까?'“휴.”'“땅 꺼지겠네. 집이 어디야?”'“됐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주소나 말해. 긴 말하기 싫으니까.”'태현 선배의 억지키스 탓에 혜린의 입술은 붉어져 있다. 진우는 그런 혜린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본인은 그리 자각이 없는 듯이 보였지만, 이대로 이 시간에 혼자 거리로 나가면 남자들이 달려들 것이다. 지독한 색기로군. 자제력하면 보통 이상인 자신조차도 그녀의 입술을 보자 키스하고 싶어졌다. 아니, 그보다 더 그녀를 완전히 안고 싶었졌다.'“혼자 간다니까요.”'“얌전히 데려다 준다고 할 때 조용히 가.”'“싫다니까요. 댁을 뭘 믿고!”'“훗. 하긴 것도 그러네.”'진우는 어깨를 으쓱 한 번 해 보이더니 혜린의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싸매 주었다. 눈만 간신히 보일 정도가 되자, 만족스러운 듯 웃어보였다.'“택시!”'눈앞에 모범택시가 섰다. '“여기 이 아가씨 집에 좀 데려다 줘요.” '진우는 만 원짜리를 넉넉하게 기사에게 챙겨 줬다.'“전 택시 안 타요.”'“나중에 갚아라.”'진우는 뒷좌석 문을 열고 말했다. 혜린이를 들어 거의 택시에 넣다시피 했다.'“잘 부탁드립니다.”'부릉, 택시가 떠나자 진우는 차번호를 신중하게 외웠다. 민혜린이라…… 소문 이상인 걸? 특전사 근무를 마치고 처음 찾은 곳이 대출대였다. 진우 역시 고학생이라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였다. 학교에서 병행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대출대를 알게 되었고 끈끈한 인간애를 유지하게 되었다. 복학하고 인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요상한 소문을 들었다. ‘사람 환장하게 하는 계집애’, 속된 말로 ‘꼴리게 하는 X’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긴가민가했는데, 직접 보니 알겠다. 왜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 저 얼굴을 하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은 것이 용했다. 진우는 혜린이가 떠나고도 한참 동안 자리에서 뜨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