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알지?”'당황해서인지 아니면 겁을 집어 먹었는지 유진은 멀뚱거리며 쳐다보면서 고개만 끄덕였다.'“내가 해 줄 얘기가 있는데, 우리 저기 커피숍에 좀 들어갈까?”'“……네.”'유진은 얌전히 신혁의 뒤를 졸졸 따랐다.'“가서 커피 한 잔 사와.”'커피숍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며 신혁이 약간 거만하게 명령조로 말하는 데도 고분고분하다.'“네……그런데 뭐로……?”'“에스프레소.”'“네.”'너무도 고분고분하게 움직이는 유진의 모습과 표정은 좀 전에 남자의 지갑에서 수표를 뜯어낸 어린 꽃뱀으로 보이지 않았다. '“여기 있습니다.”'커피를 들고 와 자리에 앉으며 얌전하게 두 손으로 신혁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이봐,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네.”'“인생을 똑바로 살아.”'“네? ……저기……저 똑바로 잘 살고 있는데요.”'요즘처럼 똑바로 그리고 열심히 살아본 적이 없을 만큼 정말 정신 차리고 살고 있다. 추운 날씨 아랑곳 하지 않고 학원 강사들 월급 밀리지 않게 하기 위해 전단지 돌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뭘 똑바로 살란 말인가.'“동생이라 생각하고 말해주는데 동생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나이 많은 의사가 아니야. 그러니까 절대 네 살 이상 나이차가 나는 남자는 만나지도 마. 특히 의사. 알았나?”'“그러면……저는 어떤 남자를 만나나요? 만나기는 하나요? 언제쯤 만나나요?”'유진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신혁의 예상대로 유진은 현재 그를 용한 점쟁이로 생각하고 무언가를 얻어 듣기 위해 호기심을 뿜고 있었다.'“누구를 만나는 건 중요하지 않아. 만나지 말아야 할 남자를 피하는 게 중요하지. 알았어? 그러니 잘 새겨들어. 의사는 안 돼. 특히 네 살 이상 나이차가 나는 의사는 무조건 피해. 알았어?”'“네.”'유진은 속으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전부터 큰오빠 유영이 레지던트 중에 괜찮은 녀석이 있다며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나이는 그녀보다 다섯 살이 많다고 했는데 네 살 이상의 연상 의사는 안 된다니 지금 앞에 앉은 용한 분이 말하는 의사가 딱 그 의사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었다.'‘역시……범상치 않은 분이야. 그럼…….’'“저기요……뭐 하나 여쭤 봐도 될까요?”'“?”'유진은 사실 요새 준영과 서윤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고 과연 그 둘이 잘 될까 하는 궁금함에 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제 친구가 있는데요. 아직은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하여튼 남자가 여자를 많이 좋아해요. 그런데……둘이 조건이 좀 그렇거든요. 둘이 이루어질까요?”'그저 한마디 해주고 끝내려고 했는데 유진의 태도가 점점 그를 진짜 점쟁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만하고 일어서려 했지만 그녀에게 확실한 쐐기를 박기 위해 신혁은 한 번 더 가짜가 되어 그녀의 믿음을 확실하게 심어주고 싶었다.'“음……그 남자 친구가 대한민국서 손꼽히는 재벌가 자제 아닌가?”'“헉!”'귀여운 눈이 튀어나올까 걱정될 정도로 유진의 눈이 커졌다. '“그 여자 친구는……상처가 있군.”'“어머! 어머!”'이제는 손뼉까지 쳐가며 놀라는 것이 만일 하나만 더 터뜨리면 뒤로 넘어갈 태세다. 그런데 그 서윤이란 친구에 대해서는 준영에게 상처가 있다는 얘기밖에 들은 것 없어 뭐라 할 말이 없었다.'“그 둘이 잘되고 못 되는 것도 동생하기 나름이야.”'“네?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잘 생각해봐. 무슨 말인지. 그리고 절대 잊지 마. 뭘 잊지 말라는 지 알아?” '“네. 네 살 연상 이상의 의사는 안 된다고…….”'“의사뿐 아니라 네 살 연상의 남자는 아예 생각지도 마. 그것만 알아들었으면 나머지는 다 괜찮아.”'신혁이 일어섰다.'“아니, 저기요, 그리고요…….”'이제 점쟁이 역할을 그만이다. 신혁이 날카롭게 유진을 쳐다보았고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표정에 유진은 입을 다물었다.'“가 봐.”'“아니……저기 또 물어볼 말이 있는데…….”'그러나 신혁은 그런 유진을 무시하고 커피숍을 나와 유진이 보지 않도록 재빨리 몸을 숨기려 의국으로 가고 있었다.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자들과 서슴없이 만나고 연애를 하는 걸 보면 닳고 닳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커피숍에서의 그녀 표정과 말투와 태도는 너무나 순진해서 자신이 순진한 아가씨를 데리고 농락하고 있다는 죄의식까지 느끼기도 했다. 아무리 뭘 몰라도 그렇지 그렇게 순진한 표정으로 단 한 점의 의심 없이 자신에게 빠져드는 그 얼굴이 떠올라 이번엔 웃음이 새어나왔다. '“최 선생 이리 와봐.”'이익현 교수였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 신혁을 부르더니 대화를 나누던 의사에게 신혁을 인사시켜 주었다.'“김 교수, 이 친구가 그 친구야. NS (신경외과)의 전설. 외모냐, 능력이냐, 말이 많은 펠로우.”'“반가워요. 궁금했었는데.”'반갑게 인사하며 손을 내미는 교수를 보자 신혁은 얼굴이 굳어졌다. 유진과 시시덕거리던 한심한 의사였다.'“아, 네. 안녕하십니까? 최신혁입니다.”'겨우 표정 관리를 하며 앞에 있는 교수가 내미는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PED (소아과) 김유영이오.”'김유영. 그의 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데 김유진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김유영. 김유진. 그리고 유진이 김유영 교수를 부르던 호칭, 오빠.'‘뭐야? 그럼 진짜 오누이?’'반은 형식적이고 반은 농담인 유영의 말이 끝나고 신혁이 물었다.'“저기……교수님. 혹시 나이차 나는 여동생 있으십니까?” '“어떻게 알았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여동생이 있지.”'괜한 짓을 했다. 자신을 신 내린 용한 도사라고 믿고 있던 유진만이 아니라 자신도 유진과 마찬가지로 엉뚱한 오해를 하며 엉뚱한 짓을 하고 말았으니 결국 삽질은 유진만이 한 것이 아니라 신혁도 함께 열심히 삽질을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