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싱그러운 초록빛과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어느 공원인 듯 온통 푸른 나무들이 뒤덮여 있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그 한가운데에 그토록 사랑하는 그가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해요.]

환한 빛을 머금고 이 세상의 눈빛이 아닌 듯 영혼에 각인될 것같이 따뜻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던 그가 자신의 두 볼을 잡고 허리를 숙여 왔다. 붉은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자신의 눈이 이후에 있을 일을 잘 안다는 듯 스르르 감겼는데…….

“유진아, 빨리 일어나. 늦었어. 그러다가 또 지각한다.”

‘제발, 엄마. 결정적인 순간이란 말이야.’

멈춰진 테이프처럼 자신의 두 볼을 잡은 그 상태로 암흑으로 변한 꿈 때문에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그렇게 원하던 꿈을 이룰 수 있었는데 짜증스럽게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유진은 오늘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잠을 깨우는 엄마의 목소리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늘 꾸는 꿈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그렇게 원하던 그의 입술을 꿈에서라도 느껴 볼 수 있었는데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짜증이 듬뿍 묻어나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방에서 나오던 유진은 아침상을 차리는 엄마를 원수라도 되는 양 그렇게 째려보고 있었다.

“눈 찢어질라. 꿈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어서 씻고 와.”

“내 평생소원인데 엄마가 다 망쳤어. 요즘 들어 잘 꿔지지도 않아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데 꼭 결정적인 순간에 코를 빠뜨린다니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저러는지 원.”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유진의 엄마는 늘 그렇듯 하던 일을 할 뿐이었고 유진은 엄마의 그런 푸념은 상관없다는 듯 툴툴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완전 불치병이라니까. 내가 이참에 연예인이든 그게 안 되면 매니저라도 해서 저 개꿈을 이루게 해줘야 하는 건데. 진짜 안타깝다.”

툴툴거리는 유진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는 유민은 도대체 나이는 어디로 먹는 것인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유진의 헛꿈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기에 한 살 더 먹은 누나가 철부지 여동생처럼 느껴졌다.

“한마디만 더 하면 아침부터 초상 치른다.”

유민의 말에 유진은 주먹을 움켜쥐고 화장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유민에게 옮겼지만 매일 치르는 전쟁인지라 자신을 노려보는 엄마의 눈빛에 그만 항복하고 말았다.

‘오늘도 어째 일진이 사납겠구나.’

유진은 늘 그렇듯 이렇게 미진한 꿈을 꾸고 나면 회사에 가서도 온통 못다 이룬 꿈 때문에 연신 실수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서 일진이 사나운 것은 어쩔 수 없이 돌아오는 부메랑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스러울 정도였지만 이젠 그마저도 당연한 듯 고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어쨌든 꿈에서라도 그를 볼 수 있었으니까.

대충 씻고 출근 준비랄 것도 없이 손에 잡히는 옷으로 갈아입고 젖은 머리를 대충 턴 것이 전부였지만 어쨌든 가방과 외투를 의자에 걸치고 식탁에 앉은 유진은 마치 모래를 씹는 양 입 속이 깔깔했다. 그러나 자신을 노려보는 엄마의 눈빛을 의식하며 입 속으로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미 상당히 경과한 시계를 바라보며 후다닥 가방과 외투를 챙겨 들고 무작정 버스를 향해 뛰어가고 있는 유진의 머릿속엔 자신을 향해 고함을 치는 박 부장이 아닌 어이없게도 자신을 향해 사랑한다며 입술을 내밀었던 하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애써 하운의 잔상을 털어내는 유진이었다.

언젠가도 오늘처럼 아쉬움이 가득했던 꿈 때문에 버스에 올라서도 하운의 잔상을 쫓아 정신을 반쯤 놓아 버리는 통에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쳤고 그 결과 당연히 지각으로 연결되며 엉망이 되었던 그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머피의 법칙 좀 제발 피해 가자.’

여전히 떠오르는 잔상을 머릿속에서 애써 밀어내고 회사에 도착한 유진은 경리부에 다녀오라는 부장님의 지시에 서류 다발을 챙겨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7층 버튼을 눌렀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남자의 구두만 살짝 봤을 뿐이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에 흐릿하게 비치는 커다란 남자의 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등 뒤에서 서늘한 오라를 뿜어대며 자신에게 그늘을 만들고 있는 남자에 대한 궁금증에 유진은 기어이 고개를 살짝 돌려 남자를 흘끗 보았고 이내 두 눈이 더 커질 수 없이 커지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지만 절대 가려질 수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기에 유진은 남자를 한눈에 알아봤다. 더구나 남자는 입사와 동시에 회사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만 무성했던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TV와 스크린을 주름잡고 있는 마재민이라는 사실이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1년이나 지났지만 통 얼굴조차 구경할 수 없었기에 그저 헛소문일 거라고 그렇게 단정 지었었는데 지금 자신에게 어두운 그늘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분명 마재민이 확실했다.

‘우아, 이게 웬일이냐. 정말 내 꿈을 이뤄 주려나?’

유진은 혼자서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했지만 어느새 5층까지 올라간 엘리베이터를 보며 자신에게 허락된 짧은 시간에 그 어떤 설명조차 할 수 없었고 허둥지둥 서류 뭉치에서 아무 종이나 꺼내 불쑥 내밀었다.

“초면에 상당히 죄송한데요. 시간이 별로 없어서……. 하운 오빠랑 친하다고 들었는데 하운 오빠의 연락처 좀 알 수 없을까요? 아, 제……. 제가 그렇다고 스토커나 뭐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하운 오빠 목소리라도 들어 보고 싶어서요. 안……. 안 될까요?”

너무 시간이 촉박한 터라 그 흔한 인사말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 버린 자신을 그저 빤히 바라보던 재민은 너무도 황당하다는 듯 웃어 버렸고 그런 재민의 웃음에 유진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황당하더라도 뭘 그렇게 대놓고 웃는지 자신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자각도 하지 못한 채 걸러지지 않은 말이 툭 튀어나왔다.

“가르쳐 주기 싫으면 말지 왜 웃고 난리래.”

입을 삐죽거리던 유진은 7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에서 미련 없이 내렸지만 여전히 배를 잡고 웃어대는 재민을 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재수 없는 놈. 왜 비웃고 난리야. 자기가 스타면 단가? 에이 씨. 역시 오늘도 아침부터 일진이 사납네. 만나려면 하운 오빠나 만나지. 하필이면 왜 마재민이냐고……. 하여간 늘 2% 부족하다니까.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짜증 나.’

#1. 만남

재민은 아침부터 자신을 회사로 부른 아버지의 부름에 잔뜩 찡그린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직도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기회만 있으면 회사로 돌아오라는 잔소리를 해대는 아버지가 오늘도 역시 그 씨도 먹히지 않을 레퍼토리를 읊고 싶으신 것 같았다. 요즘 들어 부쩍 건강이 좋지 않다며 전화를 해대더니 오늘은 강력하게 자신을 찾아오라고 명령을 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회사로 향했던 것이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가 주길 바랐던 엘리베이터가 2층에서 멈추자 재민은 습관적으로 얼굴을 돌렸고 그가 원한대로 여자는 자신을 몰라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등 뒤에 서 있는 자신을 흘끗 보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서류 더미 속에서 종이를 꺼내 움켜쥐자 으레 늘 그렇듯 자신의 사인을 바라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여간 이놈의 인기는……. 귀찮게 됐군.’

재민은 종이를 움켜쥔 채 고민하고 있는 여자를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고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확인하던 여자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 것인지 자신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종이를 내밀며 여자가 불쑥 꺼낸 말은 자신이 예상했던 말이 아니었기에 재민은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초면에 상당히 죄송한데요. 시간이 별로 없어서……. 하운 오빠랑 친하다고 들었는데 하운 오빠의 연락처 좀 알 수 없을까요? 아, 제……. 제가 그렇다고 스토커나 뭐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하운 오빠 목소리라도 들어 보고 싶어서요. 안…… 안 될까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웃기만 하는 자신의 행동에 여자는 허탈한 것인지 아니면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자신을 향해 눈이 찢어지도록 노려보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재민은 아예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열렬한 광팬인가 보네. 아니다. 이참에 하운이 놈한테 소개라도 해줄까? 꽤 재미있는 캐릭터의 소유자인 것 같은데 말이야.’

재민은 입술을 쭉 내밀며 원망과 미움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던 여자를 떠올리며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굳이 다시 열어 여자를 불러 세웠다.

“저기, 잠시만요.”

“…….”

자신의 부름에 멈춰선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섰지만 얼굴은 여전히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조금 과하게 웃었다고는 해도 자신은 누구나 사랑해 준다는 스타였는데 별로 볼 것도 없어 보이는 여자는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싫다는 표시를 팍팍 내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자신이 처음 본 여자에게 하운의 연락처를 순순히 알려 주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는데 여자는 그런 스스로의 행동엔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