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주거구역

#Ep.1 사적인 첫 만남.

“뭐라고…? 귀농…을 하겠다고…?”

“그래… 너희 아버지 건강도 안 좋고 이제 나도 좀 공기 좋은데 가서, 쉬엄쉬엄 살란다! 너도 이제 잘나가는 팀장인지 뭔지 달았고 우현이도 제대하고 복학하면 기숙사 들어간다니까 너도 너 살 집 구해!”

“아니… 엄마,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상의한마디 없이 이렇게 통보하는 게 어디 있어?”

“너는 뭐 나한테 언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가할 건지 상의했어? 20대도 아니고 다 큰 딸 언제까지 우리가 데리고 살아? 이 정도 키워줬으면 이제 독립해! 싫으면 결혼을 하든가.”

제이기획 전략기획본부 마케팅 팀장 정이현, 31세의 그녀는 최연소 여성 팀장으로 밖에서는 팀원들의 존경을 받지만, 집에서는 그저 연애도 안 하고 시집도 안 가는 걱정거리였다.

그런 그녀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이현의 엄마 이순애 여사는 이현에게 오늘 아침 출가 통보를 했다.

“하….”

“뭐야? 땅 꺼지겠네… 무슨 일 있어?”

유은이다. 김유은, 제이기획 전략기획본부 홍보팀 과장으로 이현과는 대학동기이자 입사동기로 이현에겐 둘도 없는 친구. 모두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빠르게 승진한 이현을 시기하지만 유은만큼은 이현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항상 이현의 편이 되어주었다. 그런 유은이지만…

“나 집 구해야겠다… 엄마 아부지 귀농하신다고 나도 나가래….”

“뭐? 푸흡… 와 정이현 그렇게 독립 싫다더니…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네? 크하하, 어머니가 큰일 하셨네.”

몇 달 전부터 이현에게 한 시간 거리 출근하지 말고 회사 사택에 들어와서 같이 살자 꼬드기는 유은이었으니, 이번만큼은 이현의 편이 아니었다.

“요즘 전세는 얼마나 하려나….”

“진짜 집 구하게? 야 괜히 너 혼자 사는데 돈 쓰지 말고 사택 들어와! 지금 나 있는 집 혼자니까 우리 집으로 신청하면 바로 들어가라 할걸?”

“너 왜 혼자야? 영업팀 이 대리랑 같이 사는 거 아니었어?”

“결혼한다고 지난달에 나갔어.”

“아, 참, 결혼한다 했지… 그래도… 사택에는 한 건물에 회사 사람들 다 있잖아… 불편해….”

“불편할 것도 많다… 너 같은 집순이가 퇴근도 늦으면서 집 밖에 돌아다니다 회사 사람 마주칠 확률이 퍽이나 높겠다.”

“그런가…? 그래도 불편할 것 같은데….”

이현은 유은의 말에 조금씩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제이기획 마케팅팀 회의.

이현은 최연소 팀장답게 날카로운 눈빛으로 회의를 주도했다.

“이미 런칭 완료해서 입점해있는 곳들도 안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주시해주세요, 아 김 과장님 해외 브랜드 쪽을 좀 살펴보셨나요?”

“네, 타겟 브랜드가 세 곳 정도 되는데 세 군데 간략한 정보는 오늘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팀장님 검토 완료되시면 바로 세부 기획안 올리겠습니다.”

“좋습니다. 두시 전까지 리스트 넘겨주세요. 자 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마치고 식사들 하러 가시죠.”

회의가 끝나자 조용하던 팀원들이 활발해지고 회의를 주도하며 계속 말을 하던 이현이 조용해졌다.

그 중에서도 회의 내 한마디도 없던 이지연 주임과 윤수민 대리의 점심 메뉴에 관한 수다를 들으며 이현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 대리님 오늘 김치찌개 어떠세요? 저 어제 오랜만에 달렸더니 해장이 너무 필요한 거 있죠.”

“어머 이 주임 어제도 달렸어? 젊다 젊어, 어떻게 하루도 안 거르고 술이 들어가?”

“이 주임! 그렇게 방심하고 들이붓다가 한순간에 훅 간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김태준 과장이 윤 대리를 거든다.

“아이 참 과장님, 저 그렇게 또 매일 마시고 그러진 않아요! 아우, 속 쓰려… 윽 우리 빨리 뭐라도 먹어요.”

이 주임이 말을 하다가 속 쓰림에 인상을 쓰며 점심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이주임 해장 시키려면 김치찌개로 먹어야겠네 하하… 팀장님 괜찮으시죠? 한 대리도 김치찌개 콜?”

윤대리가 이현과 말없이 웃고만 있는 한석현 대리에게 동의를 구하고 제이기획 근처 김치찌개 집으로 다 같이 자리를 옮겼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이 주임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죽다 살아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런 이주임을 보며 모두가 미소 지었다.

“어? 한주원 이사님이다!”

윤 대리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식당 앞을 지나가는 주원과 그의 비서 정한에게로 향했다.

훤칠한 키에 딱 벌어진 어깨, 날카로운 턱선과 베일 듯한 콧날, 깊은 눈동자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붉은빛을 띈 입술, 구김 없는 슈트를 딱 떨어지는 핏으로 받쳐주는 군살 없는 허리선과 기럭지, 부드럽게 이마를 살짝 덮은 머리칼까지.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는 주원은 그 자체로 예술품과 다름없었다.

뒤이어 따라오는 주원의 최측근인 비서 이정한, 그 역시 주원 못지않게 큰 키와 훤칠한 외모, 드넓은 어깨를 소유한 지덕체를 갖춘 엘리트로 두 사람이 함께 거리를 걷는 모습은 그야말로 화보였다.

“와… 진짜 그림 같다….”

“그러니까요… 오늘도 눈 호강 제대로 하네요.”

이 주임과 윤 대리의 말에 주변 테이블에 있던 여직원들은 물론 이현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동의를 표했고, 한 대리를 제외한 남직원들은 인상을 구기며 주원과 여직원들을 번갈아 보았다.

“자자, 식사 끝나셨으면 그만 일어나시죠? 오늘 간만에 팀장님이 쏘는 커피가 땡기는데… 팀장님! 카페로 옮길까요?”

“그래요.”

김 과장의 말에 이현이 웃으며 답하고 수민과 이 주임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따라 일어섰다.

카페에 들어선 이현과 팀원들은 주원과 정한이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김 과장과 친한 정한이 먼저 아는 체를 하고 마케팅팀 전체가 주원에게 인사를 했다.

팀원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던 주원이 이현과 눈이 마주치고 이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자자, 주문받아요, 뭐 드실지 메뉴 알려주시고 팀장님은 카드도 주시고.”

이 주임이 메뉴를 모으고 이현이 카드를 꺼내는 모습을 주원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런 주원을 정한이 쿡쿡 찔렀다.

“형… 이럴 땐 형이 산다고 하는 거야.”

정한이 귓속말로 주원에게 말했다.

회사에서 업무를 볼 때는 빈틈없는 주원에게 꼬박꼬박 이사님으로 대우하지만, 대인관계의 센스가 부족한 그에게 정한이 이런 식으로 알려줄 때는 사적인 친분을 앞세워 형이라 부르곤 했다.

정한의 말에 주원이 잠시 움찔하다가 나섰다.

“제가 사겠습니다. 이 주임, 정 팀장 카드 돌려주고 이 카드로 주문하세요.”

“괜찮습니다. 이사님,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에이, 팀장님! 팀장님 카드는 킵 해두고 오늘은 이사님이 사주시는 커피 좀 마셔보죠?”

“그래요. 이사님이 사주시는 커피는 왠지 더 달콤할 것 같아요! 호호호”

이현이 주원의 카드를 거절하려 했지만, 팀원들은 이현보다 주원의 카드를 원했기에 결국 주원이 사주는 커피를 다 같이 한잔 씩 들고 카페를 나왔다.

카드를 돌려받은 손이 민망해진 이현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주원에게 고맙다는 듯 목례를 살짝 건넸다.

“이사님 커피 잘 마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회사로 돌아와 마케팅 팀원들은 주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마케팅팀이 있는 7층에 내렸다.

이현도 주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내렸고 주원 역시 그런 이현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자리로 돌아온 이현은 사택 신청서를 작성해두고 고민에 빠졌다.

‘하…, 그래 유은이랑 둘이 사는 것도 다시 해보고 싶었고… 뭐 집에서만 있을 텐데 회사 사람들 많이 안 마주치겠지….’

이현은 결심을 하고 사택 신청서를 인사팀 메일로 보냈다.

“팀장님 오전에 말씀드렸던 하반기 런칭 타겟 브랜드입니다.”

“아, 고마워요, 김 과장님. 이사님께 보고 드리고 한 곳 정해서 알려드릴게요.”

Rrrrrr.

이현의 자리 전화가 울렸다.

마침 주원이 해외 브랜드 리스트를 보고 싶어 한다는 전화였고, 이현은 김 과장이 건넨 리스트를 다시 한번 검토하고 주원이 있는 10층 본부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