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주거구역

#Ep.58 결자해지

윤현의 병원을 나와 바로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주원은 캔 맥주 하나를 따면서 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네, 정이현입니다.]

“나에요, 어디에요?”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밖에 나왔어요.]

“어딘데? 나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아… 일찍 왔네요? 제가 조금 이따가 전화 다시 할게요. 좀 쉬고 있어요.]

“이현…!”

주원이 이현을 부르기도 전에 이현은 다시 연락 준다는 말을 남기고 끊어버렸다.

주원은 공허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캔 맥주를 들이켰다.

이현을 만나지도 못하는데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던 주원은 거실 탁자에 서류들을 펼쳐놓고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자 몰려오는 피로감에 주원은 잠시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댔다.

잠깐 기댄다고 기댔는데 그사이 주원은 잠이 들었다.

삑 삑 삑 삑.

주원이 잠든 사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현이 살며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현은 주원의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기대 잠든 주원을 발견하곤 주원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다가가 널브러진 종이를 정리하곤 주원의 옆에 앉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얼굴에 이현은 애틋한 마음으로 주원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앞머리가 눈가를 가리자 조심스러운 손길로 주원의 머리칼을 정돈해주었다.

이현의 작은 터치에 주원이 스르르 눈을 뜨며 이현을 바라보았다.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요. 침대에서 편하게 자지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잠깐 눈 감는다는 게 잠들었나 봐.”

“그새 수척해 진 거 같은데….”

“당신이 얼굴을 안 보여줘서….”

“미안해요, 일찍 온다고 서둘러 왔는데….”

“어디 다녀온 거야?”

“친구 좀… 만나고 왔어요….”

주원의 질문에 이현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 어색함을 눈치챈 주원이 이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낮에도 친구 만난 거야?”

“네, 오랜만에 보는 친구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네, 저녁은 먹었어요? 나 좀 출출한데, 뭐 먹을까?”

낮에 만난 하진과 조금 전에 만난 정한은 친구도 아니었고, 같은 사람도 아니었지만 주원에게 지금 당장 설명할 수 없는 만남이었기에 이현은 대강 대답하며 화제를 돌렸다.

“난별로 생각 없어요. 좀 피곤하네….”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이현을 눈치챈 주원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눌러 담고 다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런 주원의 모습을 본 이현은 당황스러움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이내 체념하고 가방을 챙겼다.

“그래요? 그럼, 푹 쉬어요. 난 이만 가볼게요….”

이현이 짧은 인사를 남기고 조용히 나갔다.

이현이 나가자 주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현의 얼굴을 보자 오늘 낮에 윤현이 먹고 있던 도시락이 계속 떠올랐다.

그냥 직접 물어볼 걸 그랬나…?

그녀의 대답이 윤현에게 향할까봐 차마 두려워 묻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대하는 것 또한 힘겨웠다.

당분간은… 혼자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주원의 집을 나온 이현은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주원의 낯선 태도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간신히 나왔지만, 문이 닫히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주원을 돕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주원에게 아직 알릴 순 없다.

근데, 그걸 이렇게 주원이 신경 쓰고 서운해할지 몰랐다.

이현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주원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믿고 조금 더 기다려주었으면 싶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심증으로 주원에게 희망을 줄 수 없었다.

조금 더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면 모든 오해도 풀리겠지….

월요일 아침.

어느 때와 다름없이 주원은 윤 상무의 주변을 조사 중이었다.

이현과 주말 내내 연락 한 통 주고받지 않은 것만 빼면 평소와 다름없었다.

복잡한 속과 달리 태연한 모습으로 업무를 보고 있던 중, 정한이 주원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이사님, 찾았습니다!”

“뭘?”

“최윤현 팀장이랑 윤 상무 접선 장소 cctv 확보했습니다.”

정한의 보고에 주원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밝아졌다.

“당장 가져와.”

cctv 영상을 확인한 주원은 오랜만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걸로 충분하겠다. 근데, 이건 어떻게 구했어?”

지난주 까지만 해도 윤현과 윤호영이 소속된 의류업체 사장이 대학 동기라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윤 상무까지 엮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답답한 상황 속에서 방법을 못 찾고 있을 때, 마침 정한이 윤 상무와 최윤현이 함께 식사를 했던 식당을 알아내 cctv 영상을 확보해 온 것이다.

“그게… 친절하신 익명의 제보자가 있었습니다.”

“친절하신 익명의 제보자? 누군데?”

“아, 나중에 일 다 해결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나저나 이 영상으로 이제 어쩌실 셈이에요?”

주원의 질문에 정한은 대답을 회피했다.

“안 그래도 이번 주 금요일에 감사 결과 가지고 2차 주주총회가 열릴 거야. 자료 정리해서 그때 공개해야지.”

“주총자리에서 공개한다면 이번엔 확실하게 윤 상무를 끌어내릴 수 있겠네요.”

“끌어내리다니? 내가 끌어내는 게 아니야, 지 무덤 지가 판 거지… 무덤 다 팠다는데 난 그저 차곡차곡 묻어줄 뿐 인 거고.”

주원이 냉소를 띄며 말하자 정한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정한은 주원과 한 편이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종종 자신에게 칼을 겨눈 사람이 나타날 때면 피도 눈물도 없이 상대의 목을 베어버리는 주원의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한기가 느껴졌다.

그때마다 정한은 주원에게 평생 충성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지금도 그 다짐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다.

2차 주주총회 당일 아침.

이현은 지난주 주원의 집에서 그렇게 나온 이후, 연락 한 통 없는 주원으로 인해 심란한 한 주를 보냈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그의 기분이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출근해서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게 낫다 싶었다.

하지만, 출근해서 마주친 한주원 이사는 부서장 미팅에서 마주친 모습이 전부였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한 그 자리에서 이현은 ‘정이현 팀장’으로 그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회의 중에 그와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가 늘 보여주던 따뜻한 눈빛이 아닌 냉랭한 눈빛 또한 그에게 다가갈 수 없는 벽이 되었다.

그래도 사내 소문으로 주원의 주총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 모른 척하기도 그렇고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유은의 충고대로 주원이 힘든 시간에 옆에 있어 줄 권리가 있는 사람은 나뿐인데… 게다가 주원을 돕기 위해 한 일들 때문에 그의 기분을 더 이상 상하게 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이현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주원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이현 : 오늘 주주총회죠? 잘 마치고 돌아올 거라 믿어요. 끝나면 연락줘요.’

2차 주주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제이그룹으로 출근하던 주원은 이현의 메시지를 확인하곤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없이 최윤현에게 도시락을 싸주는 이현이 밉기도 하고,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이현이 미치게 보고 싶기도 했다.

두 가지 마음이 충돌했지만, 우선 주주총회를 무사히 끝내야 한다.

지금은 윤 상무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이길 수 있다.

“이사님, 도착했습니다.”

주원이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는 사이 제이그룹에 도착하였고, 정한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주원이 차에서 내려 심호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