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

“나 이제 그만 가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그렇게 애처로운 얼굴로 서 있지 말고 들어가. 나 없어도 잘 챙겨 먹고, 잘 자고, 알았지?”

병원 로비 한 귀퉁이에 선 그녀의 어깨를 잡고 들여다보며 우림이 걱정했다. 아주 먼 곳으로 꽤 오랫동안 떠나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한 채 그녀 걱정이 늘어진 때문에 그녀는 벌써 수분 째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 중이었다. 다른 날 같았으면 벌써 주먹이 날아갔을 텐데 멀리, 그것도 봉사하러 가는 길이어서 애써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아 더는 참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하! 내가 네 아이냐? 그런 걱정일랑 말고 너나 잘 해. 또 지난번처럼 환자들 챙긴다고 네 몸도 못 챙기고 쓰러지기 직전 같은 꼴로 돌아와서 나한테 힘들게 간호하게 하지 말고.”

“알았어. 고작 한번, 달랑 하루 그랬다.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에. 언제까지 써 먹을래?”

그녀의 기억에 선명했던 그날 우림의 모습은 좀처럼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도대체 의료봉사를 하러 간 것인지 자학하러 간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몰골이 엉망이었다. 그 무렵의 우림이 가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곤 했기에 봉사를 떠난 후에도 걱정을 내려놓지 못했더니 결국 그 모양으로 돌아와서 그녀를 힘들게 했다. 그걸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글쎄. 네가 물가에 내 놓은 아이 같지만 않으면 그만 둘지도 모르지.”

“뭐? 물가에 내 놓은 아이? 하!”

“얼른 가라. 다른 사람들 기다리게 하지 말고.”

“알았다. 간다. 가. 아무리 그래도 좀 아쉬워하고 애틋해 하는 척이라도 해봐. 마치 혹 떼 낸 혹부리 영감 같은 얼굴은 좀 그렇지 않아?”

“뭐? 이젠 혹부리 영감까지? 빨리 가라. 내가 네 심장 떼어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지르는 척 하며 우림의 가슴을 손으로 두드렸다. 정말 그곳을 열어서 꺼내고 싶다는 얼굴을 한 채 말이다. 덕분에 놀란 우림이 아주 질색을 하며 한걸음 물러서며 몸서리를 쳤다.

“뭐? 야 지소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너무 심했다. 그만 해. 내가 널 살인자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빨리 갈게. 간다고. 대신…… 진짜 잘 있어야 해. 이 오빠가 보고 싶으면 전화 하고.”

“오빠? 하! 안되겠다. 너 오늘 봉사가지 말자. 내가 부전공이 정형외과인 거 알지? 네 척추 뼈 1번부터 9번까지 싹 갈아엎어 줄 테니까 다음에 가는 거로 하자. 어때?”

“아, 아냐. 나 오늘 가야해. 간다고 했어. 갈게. 간다. 가. 대신 한번만 안아보자. 알지? 내게 넌 유니콘 같은 존재라는 거.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니까 딱 한번만 안아보고 갈게. 덤으로 풍만한 네 가슴이 주는……. 윽!”

우림의 너스레에 그녀는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정강이를 걷어차 주었다. 이제 정강이 차는 것에 이골이 날 정도였다. 치프가 되고 난 이후 거의 매일 경원을 비롯한 스태프들을 걷어차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아주 절묘하게 잘도 차는 그녀 때문에 고통스러운 듯 주저앉은 우림이 이죽거렸다.

“어쩌냐? 정말 걱정이다. 너 같은 폭력 의사를 전의협에 고소하려니 그동안의 우리 우정이 밟히고 그냥 두고 보자니 네 밑에 있는 애들이 걱정이고. 그 성질에 시집도 못 갈 테니 내가 적선할 겸 널 거둬주려고 했는데 매일 이렇게 맞을 자신도 없고…….”

“뭐? 서우림! 너 이번에는 그 입을 차줄까?”

“아니. 아냐. 갈게. 진짜 간다고.”

“빨리 꺼져라. 나 오후에 수술 두 개나 있다고. 어제도 힘든 하루였는데 시간 내서 너 배웅하러 나온 건데 살짝 짜증스러워지려고 하니까.”

“아이고, 입으로는 우정 운운하면서 그런 협박이나 하고. 간다고.”

“그러니까 빨리 가.”

“…….”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돌아선 순간, 와락 자신을 끌어안는 우림이 느껴졌다.

“밥 잘 챙겨 먹어. 잠도 잘 자고. 알았지?”

“…….”

순간 그녀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가끔이 장난기를 쫙 뺀 우림과 마주할 때면 걱정스러워지곤 했는데 지금이 그랬다. 진심이 느껴졌다. 그녀를 걱정하는 우림의 진심이.

“역시. 여자는 우리 소민이처럼 이렇게 가슴이 풍만해야…….”

“윽!”

잠시 먹먹해진 가슴에 당혹스러웠던 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팔꿈치로 갈비뼈를 휘갈겼다. 우림이 고통으로 하얗게 질려서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며 그녀는 그대로 로비를 가로 질러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더는 작별 인사를 나누며 농담이나 주 받을 시간도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겨우 허리를 세운 우림이 진심으로 걱정 가득한 눈을 한 채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들을 수 없었다. 이미 사라져 버린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기고 선 우림의 눈동자도 친구를 걱정하는 눈동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소민아. 나 없을 때는 아프지 마라. 혼자 힘들면 안 되니까. 알았지?”

“치프! 응급실 호출입니다!”

누군가 그녀의 몸을 흔들어대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렇게 우림을 보내고 난 후 수술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는 겨우 30분 전 쯤 마지막 수술을 끝내고 의국 침대에 널브러졌는데 그새 또 호출이라고 흔들어대는 손길에 거의 반사적으로 겨우 대답했지만, 정작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응? 응. 알았어.”

“치프!”

“응? 아, 알았다고. 간다. 가.”

경원이 그녀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지르지 않았다면 여전히 베드에 대자로 누워 눈뜨고 잤을 것이 뻔했다. 13시간을 수술실에 있었다. 과장님을 도와서 세컨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했기에 녹초가 된 상황이었다.

“이제 12살 된 남자아이래요. 그런데 심장 천공이랍니다. 자동차 사고…….”

“일단 가자.”

심장 천공이 생기면 심막강 내에 혈액이 정체하고 양이 많으면 탐포네이드(심기능장애)나 출혈성쇼크에 빠질 수 있었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부위에 따라 심근경색까지 일으켜 사망할 수도 있었다. 일단 심막강천자를 해서 정체액으로 빼내고 세부적인 조치를 할 수 있었다.

“과장님도 곧 오신다고…….”

“알았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겨우 퇴근했던 과장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그만큼 긴급한 상황이라는 판단을 했음을 의미했다. 심장천공은 응급조치에 거의 모든 것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생명이 달린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비몽사몽간이었던 그녀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하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여깁니다.”

이제 고작 12살인 소년은 의식조차 없는 듯 말간 얼굴을 하고 누워 있었다. 구급대에서 다행히 기도 확보는 된 것 같았다. 코로 입으로 이미 꽤 출혈이 보여서 걱정된 그녀는 심막강천자부터 실시했다. 정체액을 빼내고 바로 긴급하게 MRI 검사를 했는데 구멍이 생각보다 컸다. 당장 수술해서 구멍을 막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수술 오더를 냈다. 당장 수술이 필요했다. 한 과장은 거의 도착할 시간이었고 수술방은 비어져 있으니 별 다른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수술실로 옮기자.”

“……네.”

“보호자는?”

“그게……. 부모님은 지금 여행 중이시고 형님이 오고 있긴 한데 대전에서 오고 있어서…….”

경원의 말에 그녀는 기가 막혔다. 오고 있다니? 혹시 잘못 들었나했다.

“오고 있다고? 교통사고 환자라면서?”

“네. 학원차량을 타고 귀가하던 중……. 그리고 형님 되시는 분도 볼일이 있어 내려간 길이라 도착하려면 거의 한 시간 정도 더 소요된다고…….”

“뭐야? 그러니까 지금 저 환자……보호자가 아직 도착 안했다는 거야?”

“네.”

“젠장! 꽤나 잘난 분들이네. 애는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그녀는 화가 나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지만 억지로 구겨 넣었다. 늘 겪는 일이지만 적응이 잘 안되었다. 부모가 어떻게 아직 어린 12살 소년을 혼자 두고 여행을 갈 수 있는지. 거기다 형님이라는 작자는 어떻게 12살 동생이 이 시간에 혼자 학원에서 집으로 가게 할 수 있는지. 어쩌면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는지 얼굴이 보고 싶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