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이는 설산에 올라

그대 뒷모습 바라봅니다.

보드라운 바람결에 실린 그대 내음

이내 마음으로 스며듭니다.

어느새 겹겹이 새겨진 그리움은

연둣빛 얼룩처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만나고 헤어지게 하니

사랑은 꿈같고 헤어짐은 바람 같습니다.

어찌 접어야 합니까. 그대 향한 이 마음.

어찌 놓아야 합니까. 그대 따스한 손을

명주바람 그치고 이제 아니라 하시니

잡은 옷자락…… 그만 놓으려 합니다.

꿈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설산의 그 시절 다시 닿을 길이 없습니다.

#1. 여는 문

959년. 통일 가람.

*연수전 (황태비의 처소)

평화롭고 안락한 궁 생활은 개뿔.

깐깐오월이 지나 서늘한 유월 장마철이 되면 마음이 동하시려나.

건들팔월이 지나고 열매 맺는 추수철이 되면 생각이 나시려나.

살을 에는 북풍한설이 오면 따뜻한 여인의 품을 찾으시려나.

보위에 오르신 지 벌써 삼 년. 도무지 후사 이으실 생각이 없는 황제 폐하 덕에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 없었던 황태비 유 씨는 오랜 시간 살피고 살핀 끝에 마음에 흡족한 규수 하나를 찾아내었다.

“참으로 곱다. 하늘의 선녀라 해도 믿을 만치 한 점 흠도 티도 없이 곱구나. 부디 황제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람 황실의 후사를 잇게 해 다오. 그리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내 약조하마.”

입가를 가리며 수줍게 웃는 여인의 볼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달아올랐다.

“곱다 고와! 왠지 이번에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자신의 안목에 만족한 유 씨의 마음이 전에 없이 들뜬다.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저 아이가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해 주시옵소서.”

천지신명님께 올렸던 일천 배가 드디어 효과를 보는구나.

유 씨는 서시도 울고 갈 어여쁜 아이에게 최고의 스승들을 붙였다.

치성을 드리듯 정성 들여 춤을 가르치고 예와 악을 익히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가람국 최고의 기녀들을 불러들여 사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눈빛과 말씨, 웃음소리와 숨소리, 심지어 손가락의 각도를 몇 치 몇 푼쯤 꺾어 입가를 가리고 미소 지어야 하는지, 궁둥이를 어느 정도 흔들며 걸어가야 사내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지 따위를 세세히 가르치고 다듬게 하였다.

“삼십 년 전에 우리가 이런 비기를 알았더라면 나는 황태비가 아니라 황태후가 되었고, 자네는 아무리 못해도 황귀비는 되었을 성싶구먼.”

“에구머니. 마마. 황송하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곁을 지키는 안 상궁과 농을 할 정도로 마음이 흡족하였다.

드디어 길일이 되었다!

별자리를 잘 보는 태감과 날을 맞춰 동짓달 첫날, 수개월 공들인 아이를 황제의 산책길로 내보냈다. 동짓달이 되면 유난히 눈빛이 깊어지며 말수가 적어지는 황제이시다. 유 씨는 이번에는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늘따라 바람이 참으로 차구나.

산책길에 나선 황제 율의 시야에 고운 노을이 붉게 번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파란 하늘과 은은한 주홍빛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하얀 구름이 황제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전하! 하늘을 좀 보십시오. 참으로 먹음직스럽지 않습니까?

붉게 물든 구름이 꼭 화전 위에 올려진 꽃잎 같습니다.

음…. 오늘 참은 화전이 어떻습니까? 아, 제가 먹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환청에 울컥, 그리움이 치솟아 황제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언제쯤이면 없어질까, 속이 문드러질 것 같은 애끓는 이 마음은.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황제였으나, 문득문득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걷잡을 수 없이 괴로움에 빠져들기도 했다.

“헉! 폐, 폐하. 저…. 저것이….”

다행히도, 이 내관이 호들갑스럽게 그의 아픈 상념을 깨주었다. 그리고 보니 잠깐 사이, 이 내관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감탄 섞인 탄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둘러선 모두의 눈이 향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 위로 시선을 돌리니, 복숭앗빛 속살이 훤히 비치는 속곳의 여인이 흰 비단을 나부끼며 혼신의 춤사위를 펼치고 있다. 과연 보는 이들 모두의 애간장을 녹이는 아름다운 몸짓이었다.

휘이 휘이 나부끼는 저것이 무엇이더냐?

하늘의 선녀가 틀림없구나.

어찌 저리 고울꼬.

“어마마마의 솜씨겠구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떼는 내관들을 보며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어마마마께서 참으로 한가하신 듯하니 이번 황산, 빈민구제 계획은 어머니께 맡겨야겠구나.”

여태 그리움에 일렁이던 황제의 눈빛이 금세 무심하게 바뀌었다.

“제, 제가 보기에는 사, 사람이 아니라 선녀 같습니다.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가 아닐까요?”

조 내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날아가는 새들이 길을 잃고 고운 빛 해님이 부끄러워 산 뒤로 몸을 숨길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였다.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는 이 내관과 조 내관조차 본능적으로 아랫도리를 가리며 숨을 들이켰다.

“다행이구나. 선녀라면 다시 하늘로 올라갈 것이니. 이 내관. 바람이 제법 차다. 밤거리 순찰을 강화하여 거리에서 얼어 죽는 백성들이 없도록 살피라! 오늘 산책은 선녀님의 춤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만 접도록 하겠다.”

황제께서 한마디 툭 뱉어내시고는 무심히 발걸음을 옮기시었다. 몇 걸음쯤 떼었을까?

마지못해 뒤를 따르며 시선을 돌려대던, 어린 내관 중 하나가 다급하게 비명을 질렀다.

“헉!”

곁눈질 한번 하지 않으시고 바윗돌 바라보듯 지나치는 무심한 이의 발길을 돌리기 위해 혼이 나간 듯 비단을 휘두르던 여인은 그만 차가운 돌다리 아래로 미끄러져 목이 꺾이고 만 것이다.

“이 내관. 선녀께서 하늘로 돌아가신 듯하니 고이 모셔드려라.”

황제가 차갑게 말하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지난 열흘간, 황산에서 몸소 빈민구제를 하느라 엄청난 양의 죽을 끓여댄 황태비 유 씨는 몸살을 앓고서야 급하게 환궁할 수 있었다. 인간미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아들을 보며 유 씨는 민망함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애간장이 타는 어미는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계집을 찾기 시작했다.

“안 상궁!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열, 스물, 아니 한 백 명쯤 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아무리 목석같은 사내라도 그중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겠느냐?”

허나 결국 백 명은커녕 한 명도 보내지 못하였다. 그녀가 떠나 있던 사이, 황제가 다니는 산책길은 철저히 통제되었으며 유 씨의 사주를 받아 길을 내어주었던 내관들은 곤장 스무 대와 이 개월 감봉이라는 처분이 내려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