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폭풍 전야

한 달간 이어진 휼왕의 상 직후, 새 국왕의 대관식이 있었다.

그다음 날, 새 국왕은 곧바로 대신들을 조정에 소집했다.

왕이 대관식을 치르자마자 일을 시작하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대신들은 의아해하며 자리에 모였다.

그렇게 모인 대신들 앞에서 새 국왕은 국왕으로서의 첫 어명을 내렸다.

“궁인 박란하에게 궐의 동쪽에 있는 소호전(小湖殿)을 내주어라. 또, 소호전에도 궁인을 붙이고. 평민을 모시는 일이 마뜩찮은 시종, 궁인들이 많을 터이니 이참에 대전과 왕비전의 시종, 궁인들도 모두 내보내고 평민들을 대전과 왕비전에 들여라.”

심히 무덤덤하기만 한 말투였지만, 그것은 양반이라면 누구라도 기함하고 말 어명이었다.

왕족 아닌 자, 그것도 평민에게 궐을 내준다는 것은 왕실의 법도에 맞지 않은 일이면서 전례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소호전은 또 어떤 전각인가.

이름답게 작은 연못이 딸린 운치 있는 공간으로, 지금까지 이 전각을 거처로 삼은 사람은 건국 왕의 비밖에 없었다.

꾸준히 관리를 해오고는 있지만 누군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화미국 왕실에 내려오는 불문율이었다.

머릿속에 새하얗게 변한 궁무 대신은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그것은 절대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아니 될 게 뭐가 있소. 어차피 사용하지 않는 전각인데,”

반은 궁무 대신이 반대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아주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서 궁무 대신은 입만 쩍 벌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전하, 절대로 아니 될 일이옵니다.”

결국 재상인 민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반은 불만스럽게 턱을 까딱거렸다.

“대체 무엇이 아니 된단 말이지? 사용하지 않는 전각을 누군가에게 내준다고 해서 궐의 곳간을 더 사용하는 것도 아닐 텐데. 설령 궐의 곳간을 더 쓴다고 하더라도 대전과 왕비전의 시종과 궁인들은 모두 평민으로 바꾸면 비슷하지 않겠소? 지금은 반가의 자식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궐의 곳간에서 새어 나가는 돈도 많은데.”

“하나 전하. 그것은 화미국 왕실의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옵니다. 건국 이후 그 어느 국왕 전하께서도 평민에게 궐내 전각을 하사하신 적이 없사옵니다.”

“법도라는 것도 결국 필요에 의한 것이지. 쓸모없는 법도를 지켜 가며 궐의 곳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나을 것 같은데.”

“쓸모없는 법도가 아님은 국왕 전하께서 더 잘 아실 것이옵니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궐의 문을 열었다가는 왕실이 위태로워질 수 있으며 대전과 왕비전의 시종과 궁인들은 왕실의 품위를 위하여 반가의 자식들로 채운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라니. 재상, 지금 혹시 왕실의 법도가 아니라 딸이 걱정되어 이러시는 게 아니오?”

‘딸’,

민의 여식이자 반의 공식적인 반려자인 설비, 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이름에, 순간 조정이 술렁거렸다.

반의 차가운 눈빛과 민의 거친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역시 왕비께서 빙부에게는 말했나 보군, 궁인 박란하가 누구인지.”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전하.”

“재상은 얘기할 생각이 없는 듯하니, 대신들에게는 내가 친히 알려 주지. 궁인 박란하는 내 정인이오. 한 나라의 국왕이 정인에게 전각 하나를 하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정인’이라는 단어로 조정은 한 번 더 술렁였다.

돌아가신 선왕이 채 눈을 감지도 못했는데 새 왕은 여색에 눈이 멀어 법도를 어기고 총애하는 첩을 곁에 두려 한다, 대신들의 눈에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아니 되옵니다, 국왕 전하. 선왕께서도 정인들은 모두 궐 밖에 두셨습니다. 건국 왕께서 이러한 법도를 세운 연유는 국왕 전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왕의 적자와 서자들 사이에 암투가 벌어질까 걱정이 되어서? 하,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연유이지. 그런 쓸데없는 법도 때문에 지금 왕실에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자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나야 그 법도 덕에 수월하게 왕위에 올랐다지만, 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종사를 이을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그 법도를 지킬 생각이 없다. 내 정인을 궐 안에 들이고 내 정인이 낳은 자식도 궐 안에서 키울 생각이니, 종사를 끊을 생각이 아니라면 내 결정을 받아들이시게.”

“전하, 설마 적자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법도도 저버리려 하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안 될 게 뭐가 있나. 재상, 혹시 왕비에게서 후사를 기대하고 있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전하! 아니 될 말씀입니다! 종사를 잇기 위해서라면 왕비마마와 더욱 돈독히 지내시는 것이 옳습니다!”

피를 토하는 듯한 민의 외침이 조정을 가득 울렸다.

그 울림 속에서 다른 대신들은 서로 눈빛만 주고받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은 더 이상 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면서 궁무 대신 앞에 종잇조각을 하나 내던졌다.

종잇조각을 펼쳐 본 궁무 대신의 얼굴이 다시 또 새파래졌다.

“전하, 이, 이것은…….”

“보는 그대로요. 방금 내가 말한 내용을 담은 교지이니 그대로 이행하시오. 이미 옥새는 찍었소.”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듣기 싫소. 나는 이미 어명을 내렸으니 궁무 대신은 그것을 따르기나 하시오!”

“전하!”

그러나 반은 오가는 이야기들을 그 이상 듣지 않고, 그대로 조정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남겨진 대신들은 빈 옥좌만 허망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