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마른하늘에 날벼락

“불가不可.”

상석에 자리한 이도왕. 틈이 없었다. 날렵한 외향은 둘째로 빙점이 내려앉은 눈빛은 견고했으며 길고 고른 손마디로 의자 손잡이를 툭툭거리며 철옹성 같은 대답만 되풀이했다. 청전의 기둥을 뒤로한 채 도열한 나인들은 지천에 계신 왕을 흘깃거리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심지어 내관들조차도 왕을 흘끔댔다.

대신들은 다시 한번 한 입을 모았다.

“폐하!

왕의 표정은 점점 가라앉았다.

“불가한다 하였소이다.”

“하오나…….”

청전에서의 이른 조례를 마치고도 물러설 기미가 없는 대신들은 오늘 날을 잡은 듯 그간 수차례 올렸던 왕후 간택에 대한 상소의 답을 얻고자 했다.

“폐하. 약관을 넘기신 지 벌써 두 해가 지났습니다. 하루라도 속히 왕후를 맞이하시어 사직의 대통을…….”

“그렇사옵니다. 속히 왕후를 맞이하소서!”

“폐하!”

대신들은 연속하여 거듭 외쳤다. 마치 왕의 과오를 시정토록 간언하고 있는 양상이라 이도왕은 가면 갈수록 심기가 불편했다.

“올 들어 그대들이나 친척 등등 사돈의 팔촌까지. 꽃피는 여식들이 참으로 많은가 보오.”

다소 심드렁한 어조이나 조아린 대신 몇몇은 움찔했다. 이도왕의 입꼬리가 비웃듯 올라갔다.

“뭐가 되었건 불가!”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이도왕은 그들의 의견을 묵살해 버렸다.

“폐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왕이 자리에서 일어설 기미가 보이자 대신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절절히 읍소했다. 그때 정전으로 조용히 들어서는 이가 있었다.

당하관(내관) 최고 지위인 상선 조영무였다. 그의 민머리가 유독 반짝였다. 선왕先王 때부터 뛰어난 지략과 지혜로 왕실을 건사하며 왕에게 충심을 행하고 있는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왕에 대한 예를 다한 뒤 목소리를 냈다.

“폐하. 아무리 일국이 강대하여도 후사가 없이는 무위일 뿐입니다. 고귀한 혈통이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우리 천년 사직의 번영이 아니겠는지요.”

그의 묵직하고도 따가운 일침에 대신들은 희망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도왕은 감정 하나 없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상선은 참으로 말이 많아.”

비꼼이었다. 상선 조영무는 늘 그렇듯 태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까. 신은 폐하와 왕실을 위해서라면 언제 어느 때든 입을 열 준비가 되었사온지라 부디 통촉하여 주옵소서.”

“알겠도다. 그만.”

더는 아니 되겠는지 이도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기하고 있던 내관들도 채비를 갖췄다. 역시나 대신들이 급히 나섰다. 그들은 왕의 옷자락이라도 잡을 듯했다.

“페하!”

“폐, 폐하! 부디 이 좋은 계절에 간택령을…….”

이제 대신들은 울부짖듯 했다. 상선의 목소리도 힘을 보탰다.

“폐하. 늦지 않아야 합니다. 봄의 개화가 찬 겨울까지 그대로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다시 한 번 상선의 단단한 조언이 돌아왔다. 찰나 이도왕의 표정은 서릿발 내린 듯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대신들은 행여나 왕과 눈이 마주칠까 시선을 피하는 반면 상선 조영무는 그저 온화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결국 이도왕은 체념하듯 한 소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후 문제는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겠소이다.”

마침내 왕으로부터 반승낙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와…….”

대신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을 향한 행동과는 달리 그들의 머릿속은 저마다의 실속을 차리기 위해 재빨리 계산에 들어갔다.

왕후 후보로 누굴 천거해야 할까. 막대한 권력을 잡으려면 사돈의 팔촌까지 과년한 여식은 모조리 동원해야 할 터인데…….

청전의 문이 활짝 열렸다. 모두는 왕의 뒷모습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허리 숙인 대신들 머리 위로 지엄한 당부가 들려왔다.

“단, 제대로 된 왕후가 아니라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하게 될 것인가. 모두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오.”

어조는 부드러우나 말속에 뼈가 들어 있었다. 이익을 위해 허투루 일을 도모하지 말란 의미인지라 잠시 들떴던 대신들은 곧 흥분을 가라앉혔다. 저마다의 욕심을 간파당한 것에 못내 씁쓸했다.

왕의 행차가 있은 후 청전에는 잠시 정막이 찾아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대신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들은 간택령을 언제 포교할지 또 후보는 어떻게 선별할지 등등 각기 의견을 내세우며 조율에 들어갔다.

상선 조영무만이 조용했다. 다만 시립한 내관에게 뭔가를 전하며 만면의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특별해 보였다.

얼마 후 왕이 왕후 간택을 허했다는 소식은 이내 곳곳에 전해지기 이르렀다.

유서 깊은 가문들이 모여 있는 서촌.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고택이 있었으니 도화재桃花在였다. 일명 복사꽃 피는 고택으로서 수십 년 전, 왕으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봉보부인(왕의 유모. 종1품)의 고택이었다.

굽이굽이 긴 담장이 둘러 있고 나한송과 우람한 단풍나무, 은행나무에 복사꽃이 탐스러운 과실나무들까지. 사계절 내내 그 아름다움은 유난했다.

바로 그곳 별당에서 책을 읽는 청아한 음색이 흘렀다. 봉보부인의 외딸인 부영姇榮이었다. 그녀가 한 구절 읽을 때마다 처마 밑 풍경이 합을 맞추니 흐르는 선율처럼 맑고 고왔다.

그러나 별당의 안과 밖은 유별했다. 입으론 책을 읽으나 표정만은 참으로 맹랑한 부영. 그녀는 무에 그리 못마땅한지 불퉁한 눈빛이었다. 잠시 후, 잠시 밖을 주시하는가 싶더니만 손에 든 서책 밑에서 또 다른 책을 꺼내 읽던 서책으로 감쌌다.

그리고 즉시 소리 없이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내 책 속으로 빠져든 커다란 눈망울이 데굴데굴 굴렀다.

“호오, 이러한 이야기구나. 재미나겠어.”

어찌 보면 참으로 깜찍한 모습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