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전화기를 들고 내일 쓸 꽃들을 주문하고 있던 여자는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딸랑’소리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지만 고개를 들어 들어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들고 있던 전화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 남자의 얼굴이 여자의 모든 사고회로를 정지시켜 버렸다.

오랜 시간 잊히지 않았던 오만하리만큼 당당한 남자의 얼굴과 몸짓에 여자는 마치 잊으려 애썼던 그 시간으로 돌아간 듯 무의식적으로 남자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려 했었다. 하지만 벼락이라도 맞은 듯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에 정신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오래간만이군.”

“…….”

아무 말도 못 하고 멀뚱히 서 있는 여자를 보고 남자는 피식 웃으며 여자가 떨어뜨린 전화기를 주워들었다.

“여보세요. 잠시 후에 다시 걸겠답니다.”

남자가 여자 대신 전화를 끊었는데도 여자는 여전히 그대로 굳은 채 서 있었고 남자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여자와 다르게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여자에게 다가서며 여자의 어깨로 손을 뻗었지만 현실로 돌아온 여자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 정신이 들었나?”

“…….”

“아무 말도 못 할 정도로 내가 반가운 건가? 아니면…….”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남자는 자신을 일컬어 손님이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여자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 남자가 알던 여자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손님이라……. 그것도 좋겠지. 장미꽃 100송이를 예쁘게 포장해줘.”

“죄송합니다만 장미꽃은 없습니다. 다른 집으로 가보시지요.”

눈앞에 뻔히 보이는 탐스러운 장미가 없다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으며 여자와 시선을 맞췄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은 세월도 비껴간 듯 그대로였지만 여자의 눈빛은 너무도 다른 사람처럼 차갑게 변해있었다.

“그럼 저쪽에 있는 백합으로 포장해줘.”

백합이라는 남자의 말에 가까스로 참고 있던 여자의 가슴이 기어코 쿵하고 떨어졌다. 그 옛날 여자에게 늘 백합 같다고 했던 남자의 말이 하필 이 순간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꽃들은 모두 예약된 꽃입니다. 다른 꽃집으로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백합이라는 자신의 말에 여자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고 여자가 무엇 때문에 흔들렸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남자는 지금껏 그의 입에 걸려있던 장난스러운 미소를 거두었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손님께 궁금한 것은 없습니다. 판매할 꽃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남자의 질문에 여자는 판매할 꽃이 없다며 짧게 목례를 한 후 몸을 틀어 마치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남자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 순간 남자가 돌아서 있는 여자의 등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폭탄을 투하하듯 툭 내뱉었다.

“보고 싶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여자는 자신을 안고 미안하다도 아니고 밑도 끝도 없이 다시 시작하자는 남자의 말에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던 남자의 두 팔을 매몰차게 쳐내며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다시 시작하자고? 웃기지도 않네.”

자신을 매몰차게 떨친 것도 모자라 콧방귀까지 뀌는 여자의 모습에 놀란 듯 남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고 그런 남자에게 여자는 보란 듯 쐐기를 박았다.

“난 됐거든. 차라리 나가서 다른 여자를 찾아봐. 그나마 옛정을 생각해서 이 정도에서 끝내주는 거니까 이만 꺼져.”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빨리 나가라는 듯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떼었다. 문을 활짝 열어 남자가 나가기를 기다리는 여자를 스쳐 가던 남자는 불쾌하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여자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생각해봐. 또 올게.”

남자가 그 말을 끝으로 미끈하게 잘 빠진 차에 올라 떠나자 여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안으로 들어가 소금을 한 바가지 가득 들고 나와 그의 차가 서 있던 자리에 아낌없이 뿌려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 소금을 뻔뻔했던 남자의 얼굴에 뿌려주고 싶었지만 그놈의 옛정이 뭔지 차마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다.

‘정말 웃기지도 않네. 다시 시작하자고? 어림도 없다. 강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