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 이름을 부르다, 차이현

도로를 휘감는 바람 소리에 놀란 낙엽들이 지나는 사람들의 발목에 감기었다가는 곧 길가를 붉게 수놓으며 떨어졌다. 바삭 바삭 구워지는 냄새 같은 소리를 내는 많은 낙엽들 중 하나가 한 남자의 눈에 띠었다. 남자는 천천히 허리를 구부리며 자신의 발밑으로 날아다니는 낙엽들 중 단풍잎을 하나 집어 들었다.

“사장님?”

놀란 윤철의 부름에 남자는 허리를 곱게 폈다.

“올해는 그다지 예쁘지 않다.”

“네?”

남자는 윤철의 당황스러운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리 주차되어 있던 차에 남자가 오르고 차는 곧 출발했다. 스르르 눈을 감아 버린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윤철은 언젠가부터 불쑥 불쑥 갖게 된 이 남자, 그의 오너인 박희상이란 남자에 대한 의문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드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국제적인 로펌을 이끌어 나가는 남자 박희상. 같은 남자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열등감의 대상이라 불리는 박희상을 보좌한 지 벌써 4년째였다. 장신의 키와 멋진 외모, 최연소라는 타이틀이 들어간 국제변호사 자격증에 전문 경영인 학위, 강남 최대 재력가의 외아들인 그는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 남자였다. 더군다나 가진 것에 교만하지 않아 주변사람들로부터 그의 인지도는 꽤나 컸다.

절대로 타인들 앞에서 웃는 얼굴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않는 포커페이스 같은 남자는 좀 전같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림 속에나 존재할 것 같은 남자가 길가에 흐드러지게 널려 있는 낙엽 하나를 들고는 내뱉는 말이라니.

더없이 친절한 매너를 가지고 풍부한 감수성을 보여주는가 하면, 젊은 재력가로서 가지기 힘든 따스함을 사방에 뿌리고 다니는 남자. 차를 타고 다니다가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거나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차를 세우고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 주는 남자 박희상.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라고 했다. 여기까지 본다면 분명 박희상은 완벽한 남자였다.

하지만 윤철은 지난 4년 동안 그에게서 진정한 사람내음은 맡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낙엽을 줍는 모습이 아이러니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힘드셨죠?”

“늘 똑같아.”

길지 않은 단음의 목소리.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의 박희상은 언제나 엄숙했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그를 보며 윤철은 입 밖으로 나오려고 했던 말들을 쑤욱 밀어 넣어 버렸다. 근 6개월간의 출장. 국내용 보좌관인 윤철은 자신이 따라가지 못한 뉴욕에서의 박희상이 멋지게 터트린 사건의 뒷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오는 소식이었지만 그래도 국내 최대 기업인 SH사와 미국 최대 기업인 LO사와의 라인센스 소송에 있어 크게 LO사를 누르고 대한민국 기업을 살린 그의 실력은 지금 현재 매일같이 경제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잘 채워진 지퍼백이니 윤철로선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서울지검 박 판사 스카우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대?”

“네? 아, 박 판사님이요? 이번 주 안으로는 완료될 것 같다고 김 변호사님이 어제 오후 회의에서 말씀하시던데요.”

“그래?”

윤철은 드디어 시작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등줄기에 일단 길다란 땀 한줄기를 흘려보냈다. 짧은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희상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로펌 안에서의 일들은 모두 그의 입에서 전해져야 했다. 보고서도 보고서지만 일단 이렇게 공항에 마중하러 나갔다 오는 차 안에서 그는 하나의 실수도 없이 희상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강 변호사 팀이 맡은 분양사기 사건은?”

“지금 합의 중에 있답니다. 강 변호사님은 현재 30억 선에서 합의를 유도중이고요.”

“음…….”

일종의 회사에 도착하기 전 브리핑이 거의 다 끝났다 생각하는 순간에 맞추어 희상의 입도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수많은 차량으로 인해 거북이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희상은 이 느림에 익숙했다. 그리고 이 느림을 통해 하는 생각들을 즐기었다. 6개월, 그가 한국에 없는 동안 그의 회사에 그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를 떠올리는 희상의 눈가에 잠시 미소가 걸치었다. 차가 마지막 다리라 할 수 있는 동호대교에 올랐다. 동호대교 옆 작은 산봉우리. 아파트 뒤로 조금이나마 보이는 그 산봉우리가 그의 시선을 놓질 않았다.

달맞이봉. 변함없는 달맞이봉에 그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졌다. 어떻게 변했을까. 16년이 지난 지금 그 누군가의 변한 얼굴은 그릴 수 없었다.

‘내가 변하지 못한 것처럼 너도 변하지 못했을까, 차이현.’

가을 햇살을 서울 가장 높은 곳에서 받고 있는 곳, 달맞이봉에서 시선이 멀어질 때쯤, 동호대교를 건넌 차는 압구정동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댁에는 언제쯤 가시겠습니까? 오전부터 사모님께 전화가 왔었거든요.”

“내키면 가지.”

“그럼 전화라도…….”

“윤 비서, 자넨 내 업무상 비서지 내 마누라가 아니야. 어머니 전화는 일 핑계 대고 끊어.”

압구정동 가장 번화가에 그의 제2의 집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커다란 이니셜간판을 걸고 있었다. 법무법인 P&S 25층 건물 중 20층부터 25층을 통으로 쓰고 있는 그와 친구 창현의 법률사무소였다.

그는 좌석 깊숙이 들이밀었던 등을 떼어내고는 정자세로 바꾸었다. 경비원의 인사를 받으며 차가 빌딩 정문 앞에 서자 희상은 바로 차에서 내렸다. 고장 난 녹음기와 같은 어머니의 잔소리라면 이제 진력이 난 상태였다. 효자? 벼락부자의 아들로서 명예만 가지면 다 갖는다는 욕심을 들어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효자라서가 아니었다. 얻을 것을 얻기 위한 눈속임이라는 것.

희상은 부리나케 그를 향해 달려와 허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하는 부담스런 경비원들의 모습에 어머니의 잔소리를 합치고는 속으로 올라오는 경멸의 비웃음을 열심히 삼키면서 아주 친절한 미소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