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실(喪失)''''《혜준》 '사건이 시작된 그날은 내가 싫어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른 봄에 내리는 비는 추운 기운 속에서도 여린 싹이나마 틔워보려는 나무나 꽃에게는 반가운 손님일지는 몰라도 며칠 전부터 으슬으슬 몸이 좋지 않은 나에게는 한기를 더해주는 비였다. '비가 오는 날, 서울도 아니고 양수리에 있는 드라마 세트장까지 운전하는 일도 고역이었다. 난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운 뒷자리에 앉아 내리는 비를 다시 한 번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나서 문을 열고 얼른 우산을 받치자 매서운 바람이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흩뜨려 놓았다. '난 가지고 온 종이쇼핑백이 젖지 않게 끌어안다시피 하며 종종 걸음을 쳤다. 승준이가 있는 세트장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축하합니다, 임신 5주입니다.』'2주 전 의사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원인 모르게 계속되는 미열에 동반하여 시도 때도 쏟아지는 잠 때문에 뭔가 잘못됐나 싶어 종합병원 내과로 갔더니, 잘못 왔다며 산부인과로 트랜스퍼해 주어서 확인한 임신이었다. '아픈데도 미련하게 별다른 약을 먹지 않고 버틴 것이 다행이라고 혼자 가슴을 쓸어내리자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행복이 입가까지 번지는 것을 느꼈다. '결혼 생활을 한지 3년이 가까워오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내내 초조했었는데 드디어 우리에게도 아이가 생겼다는 말에 너무나 기뻤다.'『승준 씨, 축하해! 당신, 아빠가 된대!』'방송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시험에서 백점 맞은 아이처럼 자랑하듯 꺼낸 말에도 그는 얼굴을 굳히며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의 그 섭섭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욱신거린다. '남들처럼 나를 안고 빙글빙글 돌리며 기쁨을 표시해 주기를 원한 건 아니었지만, 웃으며 뭐라고 한마디쯤은 할 줄 알았다. 기쁘다고, 잘됐다고. '워낙 사귈 때에도 표현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갑절로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시작한 관계였다. '평소 같으면 따라 들어가서 애교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 장하지?’하며 그의 품에 기대었을 텐데. 그러면 그는 또 ‘그래.’하는 무뚝뚝한 말로 날 안아줬을 텐데. '몸이 안 좋아서였을까, 아님 그의 냉정함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을까. 난 그의 뒤를 따라간 작업실 문 앞에서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계속되는 냉전 아닌 냉전 때문인지 나는 몸이 더 무겁고 아팠다. '결혼할 당시부터 원만하지 못했던 시댁에서도 늘 찬밥인 탓에 미처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조차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류업계에서 꽤나 잘나가는 시댁은 처음부터 평범한 집안 출신인 나를 탐탁치 않아하셨다. 명절에 가도 늘 눈에 띄는 냉담함으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비아냥거림에 시달려야 했다. '남편 역시 굳이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는데 살갑지도 않은 시댁에 전화해서 임신 사실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친정식구들 외엔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다는 서러움에 남편 몰래 눈물을 찍어댔지만 사소한 일에도 눈물이 나는 것도, 그의 무심함이 서러운 것도 그저 임신 탓으로 돌렸다.'발목으로 튀어 오르는 빗물에 문득 이런저런 생각에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