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웩! 우……욱!”'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승희는 식탁 위로 젓가락을 탁 던져놓았다. '“아씨. 계집애! 하필 이런 타이밍에 일어나냐. 밥 좀 먹어 볼랬더니만.”'막 끓인 라면의 냄새는 빈속에 참을 수 없는 유혹을 뿌리고 있었지만 등 뒤로 들리는 서라운드 입체 음향은 그 식욕마저 잠재워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하고 리얼한 것이었다. '“승희야. 무, 물 좀 줘.”'평소에도 그리 크지 않던 이나의 목소리가 이제는 아예 다 죽어가는 것처럼 들렸다. 승희는 한심스럽게 이나의 방을 노려보던 눈길을 거두고는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꺼냈다. '방에 들어선 승희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이불 밖으로 반쯤 널브러진 무언가였다. '“시체가 따로 없네.”'드러난 목덜미에 물병을 올려놓자 방바닥에서 자지러지는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장의사에 전화는 안 해도 되겠군.”'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이나가 엉금엉금 이불 밖으로 기어 나오려는 시늉을 해보다가 다시 그 자리에 털썩 엎어졌다.'“삼십 분쯤 후엔 해야 될지도 몰라.”'“어우, 냄새. 도대체 술을 마신 거야, 술로 목욕을 한 거야?”'다시 방바닥이 대답했다. '“술이란 말도 꺼내지…… 흐읍! 꺼내지 마.” '“미친년. 생 쇼를 해라, 쇼를 해. 왜? 소주 한 병 더 갖다 주랴? 엉?”'소주 소리에 이나가 몸을 들썩였다. 스스로의 상상과 냄새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지경인 모양이었다. 입으로만 숨을 쉬기 위해 오만상을 찡그린 채 헉헉거리는 이나는 못생긴 붕어처럼 보였다. 승희는 가볍게 혀를 차며 물병을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미처 일어나 앉기조차 버거웠던지 이나는 엉거주춤 누운 자세 그대로 목 안으로 물을 몇 모금 흘려 넣다 말고 도로 내려놓았다. '“으, 써! 너 물에 약 탔어?”'“약 같은 소리 하구 있다. 네 입이 소태 같은 거지.”'“그런가?”'눈도 제대로 못 뜨고 그 자리에 다시 푹 꼬꾸라지듯 누워 버리는 이나를 보며 승희가 다시 타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왜 들이붓냐, 붓길! 소주 석 잔이면 시체 되는 주제에 세 병? 죽을라고 용 쓰냐? 엉? 네가 술병 나서 죽으면 병혁이 그 새끼가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려줄 줄 알아? 차라리 그 자식 학원으로 쳐들어가서 멱살을 잡고 깽판이라도 놔버리든가! 딴 여자 생겼다는 소리에 화 한 번도 못 내고 질질 짜면서 술이나 마셔? 에라이, 등신아! 나이 서른을 어디로 처먹었냐?”'“승희야…….”'“왜!”'“제발 입 좀 닫아 줘. 네 목소리 들으니깐 더 쏠릴라 그래.”'“지랄!”'이나의 머리를 향해 베개를 집어던진 승희는 그 자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그녀의 속이 이렇게 쓰리고 아픈 것은 아침을 안 먹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뚜껑이 열릴 정도로 열이 오르는 것도 어젯밤의 술기운 탓이 아니듯. 승희의 과격한 말투와 행동에도 이나는 서운한 기색 하나 없이 어느 샌가 옅은 잠 속으로 빠져든 모양이었다. 가볍게 오르내리는 친구의 등을 보며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테트리스. '중학교 때부터 붙어 다녔던 승희와 이나는 각각의 이름보다는 세트로 ‘테트리스’라고 불리는 일이 더 많았다. 모양도 색깔도 전혀 다른 그녀들이 함께 있으면 딱 맞는 짝이 된다고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승희라고 하면 자타가 공인하는 분위기 메이커에 칼칼한 성격의 소유자로 예쁘장한 고양이상의 얼굴답지 않게 끈기와 집념도 꽤 강한 편이어서 남자들도 손드는 일들을 악착같이 해내곤 했다. 덕분에 대학 때는 여자가 드문 기계공학과 중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었고, 졸업하고 한국전자의 냉동 설비설계 일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남녀를 불문하고 인정받는 실력자로 꼽혔다. '그 반면, 이나 역시도 미인이라는 소릴 자주 듣긴 했지만 그건 전혀 다른 종류였다. 승희를 화려한 유화라고 한다면 이나는 수묵화라 할 수 있었다. 전혀 튀지도 않고 눈길을 확 잡아끌지도 못하지만 희미한 농담과 선의 강약만으로도 많은 것을 표현하는 수묵화처럼 그녀는 특별히 목소리가 크지도, 말이 많지도 않은 데도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선택한 직업은 딱 어울리게도 유치원 보육교사였다.'우습게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친구들은 놀라곤 했다. 승희와 이나의 키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봐 왔음에도 늘 승희가 이나보다 강하고 당찬 모습으로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기에 실제로는 승희가 158센티밖에 안 되고 이나가 승희보다 15cm나 더 크다는 현실에는 모순조차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두 사람이 의외로 환상적인 궁합을 과시하며 함께 살기 시작한 것도 벌써 육 년째였지만, 그 육 년 중에 이렇게까지 망가진 이나의 모습은 승희에게도 낯설었다. 그 원인 제공자를 떠올리자 승희는 또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안병혁, 그 개새끼. 그건 틀림없이 인간이길 포기한 놈이야. 하! 그래. 돈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서른밖에 안 된 새파란 새끼가 마흔이 다 되가는 노처녀한테 목을 매고. 진짜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네.”'끊임없이 씩씩거리는 승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나는 이불을 뒤집어써 버렸다. 울면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삼 년 된 남자친구의 어처구니없는 결별 선언을 승희에게 전부 하소연 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막상 승희의 입을 통해서 다시 병혁의 변심을 듣게 되는 것은 잔인할 만큼 아프고도 힘들었다. '푹 뒤집어쓴 이불 사이로 여전히 승희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아무리 해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그녀의 어투가 탁구공처럼 방방 튀었다. '“그렇게 돈 많고 능력 있다는 여자가, 응? 자기 학원까지 하나 갖고 있을 정도로 빵빵하다는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안병혁 같은 자투리 파트타임 강사 놈과 연분이 나냐? 이건 분명 병혁이 그놈이 뭔가 수를 쓴 거야. 학원 통째로 꿀꺽 하려고 고의적으로 그 여자에게 접근한 거라고! 허! 그 문지영인지 문지방인지 하는 여자는 그 나이 처먹도록 인생 뭐 보고 살았데? 척 보면 이 새끼가 내 몸을 원하는 건지, 돈을 원하는 건지 몰라? 몰라서 그딴 놈한테 사랑이니 뭐니 해? 보나마나 그 새끼는 분명 결혼하고 나도 새파랗게 어린년하고 바람피우고도 남을 놈이야! 두고 봐, 지가 한 만큼 되돌려 받고 그 여자도 나중에 울게 될 테니까.”'“병혁 씨 그런 사람 아니야…….”'이나가 웅얼거리듯이 작게 말을 뱉었다. '“병혁 씨? 씨? 네 입에서 아직도 ‘씨’자 소리가 나오냐? 어?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이나는 결국 뒤집어썼던 이불을 벗어 버렸다.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도 답답했고, 계속되는 승희의 이야기도 답답했고, 무엇보다 뒤집어쓴 이불 속에 가득 고인 자신의 술 냄새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웨! 죽겠다. 에구, 머리야. 야, 그래도 너무 그러지 마라. 안병혁이 물론 나한테 죽을죄를 지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본바탕까지 완전 망가진 건 아냐. 너도 잘 알잖아.”'“알아? 알긴 뭘 알아. 니가 무슨 드라마 주인공이나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인 줄 아냐? 마냥 착하기만 하면 장땡이게? 그건 착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야, 너 친구한테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거 아냐?”'“잘한다. 그래도 그 꼴에 발끈할 기운은 남아 있는 모양이지? 그러게 그 기운 뒀다 병혁이 자식 싸대기나 갈겨 줄 일이지, 뭐한다고 그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고선 이제 와서 감정 질질 흘려가면서 술나발이냐. 삼 년이 뉘 집 똥개 이름이야? 세상에! 나 같으면 그 시간이 아까워서도 더 화가 나겠다. 체! 퍽도 착해서 애인 놔두고 바람을 피냐? 것도 장장 일 년씩이나 양다리를 걸치면서?”'“사랑이라잖아. 처음엔 그냥 직장 상사고 원장이라고만 여겨왔던 여자가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 되어 버려서 병혁 씨도 많이 힘들어했다는데……. 그 사람도 죄책감 많이 느꼈다고 울먹이는 걸 보니까 할 말이 없더라구.”'“그러니까 네가 멍청하다는 거야. 그딴 말을 믿냐?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딴 사랑은 링고도 갖기 싫다 그럴걸? 쳇. 내가 그 자식한테 더 화가 나는 건, 바로 그 사랑 타령이야. 그래. 사랑! 다 좋다 이거야. 애초부터 안병혁이란 인간 너한테 어울리는 그릇이라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니 헤어진 건 차라리 천만 번 잘한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왜 그걸 지금 이야기하는 건데? 응? 그 여자랑 사귀던 일 년은 국 말아먹었대? 내내 쉬쉬하면서 몰래 사귀다가 결혼 이야기 나오고, 지들끼리 날 다 잡고, 서로 집안 인사까지 끝냈다며! 그러고 나서 헤어지자는 이야길 꺼내는 건 무슨 생각인데? 이나 니가 최후의 보루야? 문지방이랑 강이나랑 이리저리 재 보다가 이제야 문지방이 완전히 넘어왔다 싶으니까 겨우 너한테서 미련 접는 거야? 안 그랬으면? 문지방이랑 끝까지 잘 안 됐으면 스쳐 가는 바람이 어쩌구 하면서 그냥 너랑 결혼하려고 했다는 거 아냐!”'“승희야…….”'“난 도무지 용서가 안 돼. 결국은 뭐야, 이 여자 저 여자 다 집적거려 보다가 지한테 더 유리한 여자 고른 거밖에 안 되는 거잖아. 지난 번 친구들 모였을 때 생각나지? 그때 친구들이 언제 국수 먹여 줄 거냐고 물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큰소리치던 게 그 자식이라고! 근데, 그 여자 결혼 승낙 떨어지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이나 너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은은하게 익어가는 사랑이 어쩌고 했던 녀석이 이제 와서 불같은 사랑에 빠져서 어쩔 수 없다느니 하는 소릴 하냐? 진짜 지랄도 가지가지로 한다. 누가 입으로 먹고 사는 시간강사 아니랄까 봐!”'“승희야. 그만해…….”'이나가 베개에 얼굴을 묻어 버리는 것을 본 승희는 마른 입맛을 몇 번 다시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울화통이 터지는 것만큼, 아니 오히려 이나는 더 미치고 팔짝 뛸 만큼 마음이 아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나가 몇 번 눈가를 훔치는가 싶더니 엎드린 베개 위로 얼룩이 생겨나고 있었다. '“바보.”'퉁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승희의 말에는 깊은 염려도 배어 있었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베개를 적시던 이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 병혁 씨가 떠난 거 별로 슬프진 않아.”'침묵 뒤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베개를 통과하면서 쓰다 달다는 감정을 모두 빼앗겨 버린 것처럼 둔중하고 무심하게 울려 퍼졌다. 승희는 살짝 고개를 돌려 이나의 엎드린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항상 부러워 마지않는 검고 찰랑거리는 이나의 머리카락은 숙취 때문에 조금 헝클어져 있긴 했어도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이불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승희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알아.”'그녀의 짧은 대답에 이나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되물었다. '“눈치, 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