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꼭 보기 싫은 것만 보는 날이 있어''''“또 박 간호사 등살에 자기가 나왔구나. 쯧쯧, 어째. 너 그거 친구 잘못 둔 죄다. 알지?” '수간호사인 미숙이 혀를 찼다. 이번에도 나이트 근무를 자청한 모양인지 그녀는 일찌감치 스테이션 근처에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고, 간호과장님도 특별히 넉넉하게 찔러주고 가셨고, 어쨌든 우리도 기분을 좀 내긴 내야 하는데, 그렇다고 제멋대로 긴장 풀지들 마셔. 각자 맡은 일만큼은 눈에 불을 켜고 빈틈없이 하라구. 알아들었어?”'평소답지 않게 사근하게 시작한다 싶었다. 그러나 끝마무리는 공미숙답게 무 자르듯 뚝 끊는다. 간호사들은 마땅찮은 눈치를 주고받으며 이런 날 병원이나 지키는 게 웬 말이냐며 수군대었고, 그러는 사이에도 시안만은 한쪽에서 군소리 없이 환자가 갖다 준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크리스마스이브에 근무하고 싶은 미친년이 나라고 누가 그러디?]'시안은 낮에 현진과 전화로 실랑이했던 일을 떠올라 피식 웃었다.'[얘가 왜 또 이러실까. 시안아, 제발. 이 언니 시집 좀 가자, 응?]'현진은 마치 자신이 미혼인 까닭을 시안에게서 찾겠다는 투로 사정했다. 대학동기인 현진이 철학관 집 딸내미다운 온갖 잡스런 점괘들을 들먹이며 두 시간여를 졸라대는 통에 수선스러워 정신을 못 차리던 시안은 결국 또 허락하고 말았다. 혼이 쏙 빠질 만큼 언변 좋게 구슬리는 데야 박현진을 따라올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매번 알고 당하는 자신도 우습지만 늘 뭔가 일을 만드는 친구의 활기만은 솔직히 부러웠다. '‘짠돌이 아버지가 행복인 걸 알아야지 이것아.’'정작 현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대로 입 속 케이크 마냥 오물거리다 만 시안은 잠시 어둠이 내린 창밖을 응시했다. 라운딩을 위해 스테이션을 벗어나자 한바탕 시끌벅적했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커다란 원 모양의 창가 앞에 걸음을 멈춘 시안은 언제 눈이 내렸는지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는 풍경을 발견하곤 홀린 듯 걸어가 내려다보았다. 별이 보이지 않을 만큼 흐릿한 하늘에서 아직 굵은 눈발이 흩날렸고, 병원 앞 정원에 꾸며진 크리스마스트리는 쌓여가는 눈 덕분에 이제야 제법 근사해 보였다. 숨이 막힐 지경인 황홀경에 차갑게 얼어붙었던 시안의 마음도 아이 같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날 이후 십 년 동안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크리스마스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순간 그날로 되돌아간 것 마냥 가슴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시안은 나쁜 짓을 하려는 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커다란 유리창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 천천히 얼굴을 대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의 차갑고 시린 기운은 금세 그녀의 뺨을 사로잡았다. 조금 졸렸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얼어붙은 창이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숨결로 뿌옇게 흐렸다 개이기를 반복했다. 을씨년스런 허전함이 온 몸을 에워싸자 시안은 말없이 눈을 꼭 감았다.'세상이 온통 잠든 시간, 눈꽃 하나하나가 지상에 내려앉을 때마다 묘한 음색으로 대지를 울리고 귓가를 울렸다. 그녀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결계 속에 들어와 버린 듯 부조화처럼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이성으로 억눌렀던 감성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어 툭툭 돌출되는 느낌. 자신을 옭아매온 모든 것을 분연히 떨쳐내라고 재촉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윙윙거렸다. 십년 만에 맞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니까 오늘만은 반칙해도 용서해줄 거지. 홀로 영안실에 누워 죽음을 맞았던 엄마가 생각났지만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