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야. 사람의 가슴 속에는 마음이라는 깊은 샘물이 있단다. 언제나 그 샘은 마르지 않고 촉촉이 젖어있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그 마음의 샘은 사람의 육신을 살아 숨 쉬게 하는 보배로운 대지기 때문이다. 찰지고 기름진 땅에 알곡이 여물고 나무가 자라듯이 물기 없는 메마른 마음은 쉬이 병들고 부서진다. 아무것도 살 수 없는 황폐한 황무지처럼. 아이야, 넌 마르지 않는 샘처럼 깊고 어진 마음을 가져야 하니라.”' '금국 문희제 12년. '흥겨운 풍악소리가 황궁의 긴 회랑을 돌아 궁성 안팎을 굽이치고 있었다. '화목마다 비죽비죽 새 잎이 돋고 천지만물이 겨우내 움츠렸던 동면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목왕지절(木旺之節). '인공의 호수와 가산으로 둘러싸인 풍광 좋은 누각에서 황제는 오늘도 정무 대신 미희를 옆에 끼고 육산포림의 주연과 향락에 흠뻑 젖어 있었다. '“봄이 왔건만 어찌 이 심중엔 찬 서리만 가득한가. 짐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이 국생(麴生 술)뿐이로구나.”'“망극하옵니다. 폐하.”'씁쓸히 중얼거리며 황제가 출렁거리는 금빛의 술잔을 털어 넣자 자리한 몇몇 관료들이 허리를 납작 엎드리며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세상 모든 병고가 마음에서 기인한다 들었습니다, 폐하. 어심이 그러하시니 정원에 봄이 가득한들 어찌 춘풍화기를 느끼겠나이까? 속히 황후 폐하를 맞드시어 화충한 용안을 뵙길 간원하나이다.”'“그 말이 옳다. 하나, 천지에 꽃이 널렸으면 뭘 하는가? 흔해 빠진 들꽃뿐인 것을.”'황제의 한탄에 모인 자들은 이때다 싶어 너나 할 것 없이 저마다 알고 있는 절세가인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고개를 끄덕거려가며 모인 자들의 얘기를 듣고 앉았던 황제가 흡족한 얼굴로 한마디 내뱉었다.'“과연 여기 모인 그대들은 진실로 짐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충신들이다. 자, 오늘만큼은 내 앞이라고 해서 체통 같은 거 차릴 필요 없나니. 맘껏 마시고 여흥을 즐기도록 해라!”'“황은이 망극하옵니다!”'황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관료들은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흘깃거려가며 옆에 앉은 미희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종종걸음 치며 환관들이 바지런히 술을 갖다 날랐고 음식을 나르는 궁인들의 치맛자락은 쉴 새 없이 펄럭거렸다. 흑룡이 승천하는 문양이 새겨진 붉은 두리기둥 주위를 무희들이 살빛이 내비치는 얇고 하늘하늘한 옷자락을 남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황색의 용포는 점점 더 짙은 술 향기에 젖어 들어갔고 초점이 풀린 황제의 눈동자는 몽롱하게 풀어져 환희를 쫒고 있었다. ''임강현.'짙푸르게 물오른 나뭇가지를 흔들며 한줄기 습한 바람이 뜰을 지나갔다. '“한바탕 폭풍이 몰려올 기세로군.”'뒷짐을 진 채 느릿하게 집 뒤뜰을 서성거리던 연효명은 급류처럼 몰려오는 매지구름 떼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먹물처럼 빠르게 번지는 어둠은 강직해 보이는 그의 미간 사이를 어둡게 물들여 놓았다. '“구름이 덮였다고 어찌 태양빛을 가릴 것인가!”'탄식 서린 깊은 한숨이 바람 속으로 휩쓸려갔다. '지난해 가을 황후가 죽고, 비어버린 황후자리를 놓고 조정대신들 간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은밀히 싹을 내밀고 있었다.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은 시름으로 향락에 젖어든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정사를 논하는 대신 아첨을 일삼았고 자신의 딸, 혹은 친척 중 인물이 반반하다 싶은 여자를 천거하거나 궁으로 들여보내 어떻게든 세력을 잡아보려 눈이 시뻘겠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그들 중엔 더러 근본도 모르는 여자를 용모가 출중하단 구실로 수양딸로 들여 황제에게 바치는 자들까지 생겨났다.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고 그로 인해 파당이 생겨 궁은 앞이 보이지 않는 혼탁한 모래바람 속에 선 누각과도 같았다. 이부(吏部 관리의 임명과 파면을 맡아보는 관청)의 시랑(侍郞)으로 있던 효명은 그들 중 몇몇 부패한 관리들의 비리를 고발하는 탄핵문을 썼지만 끝내 올리지를 못했다. 그래본들 이란격석(以卵擊石)에 불과하단 것을 잘 알았다. 이미 간신배들로 인해 이목이 단단히 어두워진 황제의 귀에 충언이 제대로 들어갈 리 만무했고 어쩌면 그로 인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대가는 너무 클 수도 있었다. 공연히 입 한번 잘못 벙긋했다가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구족이 멸문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연꽃은 더러운 진흙 구덩이 속에서도 제 향기를 피우는 법이지…….” '어두운 허공을 보며 조용히 한숨짓던 효명에게 채색 까치저고리 차림의 한 계집아이가 조르르 다가왔다.'“아버지!”'“청아야.”'어린 딸을 보던 효명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먹먹한 마음으로 서른에 들어서야 어렵게 얻은 고명딸을 품속으로 번쩍 안아 올렸다.'‘미안하구나, 청아야.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하렴.’'아직 제대로 피어나지도 않은 어린 딸을 보는 그의 얼굴에 깊은 심뇌가 골을 이뤘다. 신하로서 성의'(聖儀)를 올바르게 보필해야 한다는 충의와 한 가정의 가주로서 집안 식구들을 안전하게 지키고픈 마음이 날마다 가슴 안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딸아이를 품에 안은 효명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신중하게 사태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아이가 검게 변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아버지, 저기 하늘 좀 봐. 비가 올 것 같아.”'“그래, 그렇구나.”'“흐잉, 그럼 저 꽃이 다 떨어져버릴 텐데 어쩌지?”'뜨락을 물들인 연보랏빛 자정향(紫丁香) 꽃잎이 바람에 굴러가는 모습을 보며 아이가 울상을 지었다. 효명은 그런 딸을 꼭 안은 채 반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자상한 한마디를 흘렸다. '“우리 청아가 아이에서 이다음 소저가 되듯이 꽃이 피고 짐은 정해진 자연의 섭리란다.”'“힝, 그래도 난 싫은걸. 저렇게 예쁜데 금방 져 버리면 허무하잖아.”'그 말에 달리 해줄 말이 없던 효명은 입가에 씁쓸한 주름을 잡으며 빙그레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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