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악. 윽윽. 아아! 윽윽!”'연수는 모니터 화면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아무런 대화 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감흥이 안 생긴다.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인가? '응응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살포시 아래 창으로 내린 연수의 눈에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는 한글 파일이 나타났다. 커서가 껌벅껌벅 요란하게 다음 글을 써달라며 울어대고 있었다. '“나도 니들 달콤한 애정 신을 넣어 좋아 죽게 해주고 싶다고. 그런데 해본 적이 없으니 쓸 수가 없는 걸 어떻게 하니?”'24살 방연수. 그녀의 필명은 ‘방가’였다. 그래. 친구들이 늘 그렇게 부르니 그 필명이 편하기도 했다. 늘 잔잔하고 담백한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는 연수는 가끔은 넘쳐나는 애정 신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녀! 아직도 무슨 보물인 것처럼 자신의 몸을 아껴 두고 있는 여자였으니 도저히 화면으로 보면서도 그 느낌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사랑을 하기 위해 끓어오르는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연수는 그들을 그저 ‘둘은 그렇게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 말해 주기만 해야 했다. 두 주인공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 버린 후에 연수의 마음도 스산해졌다.''‘이 나이까지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나.’'커서가 껌벅거리는 것을 뒤로하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결말을 지어 버리고 나자 뭔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이럴 때는 두 사람이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어 서로를 핥고 또 내려둔 화면 속의 남녀들처럼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걸 글로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원고를 보내야 하는 날짜가 다가오면서 연수는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었다.'“작가님. 이번에는 꼭 주인공들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길 바랄게요.”'담당 편집자의 말이 연수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사랑을 해봤어야 쓰든지 말든지 하지. 그 묵직하게 짓누르는 느낌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걸 어떻게 쓰냐고!”'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연수는 다시 내려놓은 창을 끄집어 올렸다. 도대체 몇 분이나 이어지는 중인지 남자와 여자의 응응거리는 신음 소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요 며칠 연수는 마치 자신이 직접 그 관계라도 한 여자인 것처럼 남녀 두 사람의 섹스가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는지 외워 버리고야 말았다. 다운 받아 놓은 야릇한 파일을 두고두고 열어 보았다. 처음에 볼 때는 참 얼굴도 달아오르고 보다가 덮어 버리고 했었는데 자꾸 보니 이제는 참 별것도 없이 움직이는 몸동작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특히 남자가 여자의 팬티도 벗기지 않고 아랫부분을 세밀하게 애무할 때는 대체 왜 다 벗기지도 않고 저러나? 하는 투덜거림까지 하게 되었다.''RRR.'“어? 강준우!”'-……이거 무슨 소리야!'“아?”'계속되는 신음 소리에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은 것이 문제였다. 핸드폰 속으로 그 소리가 흘러들어갔음을 알고 나서는 연수는 얼른 스피커를 휙 돌려 볼륨을 줄여 버렸다.'-너! 설마!'“아니야. 나 글 쓰는 중이었어.”'-아닌데. 내가 이 소리 뭔지 잘 아는데…….'“이봐. 강준우 씨. 나 지금…….''야동을 보고 있는 중이다! 하마터면 그 소리를 크게 내어 버릴 뻔했다. 얼른 말을 돌리느라 부스럭대는 것을 느끼고 준우는 능글맞은 웃음소리를 내며 침묵했다.'-내가 이래서 너를 좋아한다니까!'“도끼질 하지 마.”'-나와. 밥 먹게.'“안 돼. 나 이거 완성해야 해. 오늘까지 원고 넘긴다고 약속했어.”'-아직도 마지막 장면에서 헤매고 있는 거야? 그거 내가 도와준다니까! 그런 건 오빠한테 부탁해야지 않겠어?'“내가 실수했어. 잊어 줘.”'-아니. 어떻게 잊어. 날더러 네가 했던 말 때문에 나 그날 밤 잠도 못 잤어. 책임져.'“끊어. 끊자. 우리.”'-아. 아냐. 정말 밥 먹자고 하는 거야. 다른 마음 얘기 안 할게.'준우는 특유의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핸드폰 속에서 볶아댔다. 큰일이었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연수는 자신이 미친 듯이 취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준우가 말하는 그 상황이 문득 생각이 나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야! 너 나랑 한 번 잘래?”'“뭐…… 뭐?”'“나 지금 애정 신을 하나 써야 하는데 도저히 감이 안 와서. 대체 그 느낌이라는 게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너는 사랑 없어도 섹스하고 다니는 놈이잖아. 내가 생리적으로 남자라는 동물을 잘 몰라서 대체 어느 순간에 그런 느낌이 오고 그런 느낌이 와서 하고 싶은 감정이 들고 그걸 하는 순간엔 대체 머릿속에 무슨 감정이 들락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고!”'“그래서. 너 지금 나랑 섹스를 하겠다는 거야? 단지 글을 쓰겠다고?”'“아! 하하.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다는 거야. 나는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으니 우리 주인공들은 매번 한국이란 나라에만 살아. 그렇다고 나는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으니 이 주인공들이 매번 자동차만 타고 다녀. 그리고…… 나……. 섹스를 해본 적도 없으니 이 주인공들이 매번 키스만 하다 끝난단 말이야. 불쌍하지 않니?”'준우는 연수의 말에 가만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쳐왔다. 생각해 보니 주인공들이 매번 이별을 했다. 제대로 된 사랑도 못하고 여주인공은 매번 남주인공한테 걷어차인다. 그건 연수 자신의 얘기였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마지막 4학년 때 1년 동안 연수는 한 학번 선배인 문병준과 사귀었다. 경영학과 같은 동기인 준우는 아직도 졸업하지 않은 대학생이었지만 다른 여자들 누구보다 친한 사이였기에 그런 연수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