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기온 덕분에 훨씬 빨리 찾아든 봄기운은 양지 녘에 파릇파릇한 싹을 틔워냈다. 날카롭던 칼바람 대신 시원하다 싶은 바람이 얼굴과 귀밑머리를 매만졌다. 덕분에 겨울철보다 훨씬 많은 관람객들이 오가는 박물관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이제 서른 가지 정도의 술 이름과 열 개 남짓한 술 담는 법을 터득한 미호는 한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이와 같이 우리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라 반주와 약주의 의미가 더 강하답니다. 그러니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는 분들은 주도를 모르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미호의 말에 애주가 남편을 둔 부인이 대뜸 남편의 팔을 치켜 올려 세웠다.'“여기 주도 모르는 사람 여기 있어요. 취하다 못해 코가 다 삐틀어지게 마신다니까요?”'“어허! 그런데 이 사람이.”'“여기도 있어요. 호호호!”'장내는 금방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러자 하나둘씩 피어나는 봄꽃 같은 미소를 머금은 미호는 기대하고 고대하던 마지막 코스에 다다랐음을 말했다.'“이제 약주 한 잔씩들 하실 차례인데요, 이 술은 판매 목적이 아니라 우리 술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저희 관장님이 직접 빚으신 술이에요. 그러니 다른 곳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귀한 술이랍니다. 이름은 호산춘인데 왜 이 술은 왜 주가 아니고 춘자가 붙을까요?”'미호의 질문에 관람객들이 각자 답을 내놓았다.'“봄 춘 자 아닙니까?”'“춘자가 빚어서 춘자?”'“봄에 마셔야 제일 맛있는 술?”'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지만 정작 정답은 나오지 않자 미호가 뜻을 귀띔해 주었다.'“이것 말고도 춘 자가 붙은 술이 더러 있죠. 시중에서도 보셨을 거예요. 물론 봄에 어울리는 술이기도 하지만 이 술에 춘 자가 붙은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이 춘 자가 붙은 술은 3번의 덧술을 해 100일 동안 숙성시켜 빚는 고급 청주를 말해요. 주로 문인과 상류사회에서 즐겨 마시던 술이기도 하지요.”'“아하!”'“지금부터 술을 나눠 드릴 텐데 손이 두 개 뿐이니까 질서를 지켜 주세요.”'“예!”'미호는 서둘러 잔을 준비하고 빨리 온 봄의 정취를 맛볼 수 있는 호산춘을 잔에 따랐다. 잔이 차기 무섭게 뻗쳐 나온 손들이 일사분란하게 술잔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성질도 급하게 호르르 털어 마시고는 품평들을 내놓았다.'“이야, 훈훈하면서도 감칠맛이 도는 것이 이게 바로 봄맛이구먼.”'“크! 알싸해!”'“그래, 바로 이 맛이야.”'“어째 난 좀 독한 것 같다. 으!”'각양각색의 반응이 쏟아지는 가운데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과는 생김새가 확연히 다른 외국인이 미호 앞에 다가섰다.'“안녕하세요.”'어눌한 한국말에 고개를 든 미호는 배낭여행 족임을 증명하는 커다란 배낭을 둘러멘 금발의 청년을 발견했다. 이것저것 거드는 잡부이긴 하지만 통역이라는 막중한 임무도 함께 짊어지고 있기에 생글생글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영어 하실 줄 압니까?』'『예. 도와드릴까요?』'미호의 제안에 청년이 반색을 했다.'『아, 그러면 감사하죠. 한국 술에 대해 알고 싶어 일부러 찾아왔는데 팸플릿 가지고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고민했었습니다.』'『그러세요? 그럼 일단 이 술 한 잔 하세요. 호산춘이라고 봄을 맞는 술이랍니다.』'미호는 마지막 남은 술을 청년에게 건넸고 청년은 공손히 두 손으로 받은 잔을 코끝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맛보다는 향을 으뜸으로 치는 문화에서 자란 사람답게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알 수 없는 향에 대해 물었다.'『처음 맡는 향인데 무슨 향입니까?』'『솔잎이에요』'『아, 그렇군요.』'청년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발품 팔아 찾아온 보람을 얻을 것 같은 미지의 술을 입술에 가져갔다. 가볍게 한 모금을 머금은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독특하긴 한데 무슨 맛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좀 독한 것도 같고요.』'『한 모금에 맛을 다 알 수 있나요.』'『그러나요?』'『그럼요. 제 생각에는 술은 그림을 보는 것과 같아요. 정형화된 맛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요.』'『와우, 멋진데요?』'청년의 미호의 의견에 찬탄의 표정을 지어 보였고 오늘도 우리 술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일조했다 싶은 생각에 어깨가 으쓱해진 미호가 친절한 안내를 맹세했다.'『마저 다 드시고 나면 박물관을 안내해 드릴게요.』'“고맙습니다.”'청년은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술을 마저 들이켰고 미호는 흐트러진 잔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둘러 술을 마신 청년이 도움을 자처했다.'『제가 도와드릴게요.』'『아니에요.』'『아르바이트로 바텐더 오래해서 잘 해요. 맡겨만 주세요.』'도움이 고맙기도 하고 싱글싱글 웃는 눈이 마음에 들기도 한 미호는 청년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어느새 한 팀이 된 두 사람은 어지럽게 널린 잔들을 일사분란하게 치워나갔다.'''사무실에서는 다가올 봄을 대비한 기획전에 대한 토론이 한참이었다. 창용이 먼저 제안을 내놓았다.'“화전 어떻습니까? 두견주 한 잔에 진달래 화전이라. 크흐!”'“좋은데?”'“봄꽃으로 술 담그는 행사는 어때요?”'“그것도 괜찮네.”'딱히 별 좋은 생각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김 과장은 창용과 은주가 내놓은 아이디어마다 맞장구를 쳤다. 조용히 두 사람이 내놓은 제안들을 듣고 있던 주환이 입을 열었다.'“둘 다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그건 하나의 주제를 가져야 하는 기획전이 아니라 주말 체험 프로그램에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신선한 아이디어니까 두 분 잘 상의해서 주말 체험 프로그램에 적용해 보도록 하십시오.”'“예, 관장님.”'김 과장이 물었다.'“그럼 기획전은 어떻게 합니까?”'“서화는 어떻습니까?”'“서화요? 서화면 그림?”'주환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우리 술과 그 술을 즐기는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통해 술과 우리 생활이 얼마나 밀접한지에 대해 홍보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아! 그거 정말 기발한 생각입니다. 왜 지금 우리 박물관에도 단원 선생의 주막이랑 혜원 선생님의 주사거배가 나란히 걸려 있지 않습니까? 찾아보면 그 외에도 수많은 그림이 나올 겁니다.”'“괜찮겠습니까?”'“괜찮다마다요. 대박입니다.”'직원들의 동의에 주환은 봄 기획전에 대한 주제를 확정 지었다.'“그럼 일단 화첩을 구해 적합한 그림을 찾는 일부터 착수하도록 하죠. 과장님께서 맡아 주시겠습니까?”'은주가 쏙 나섰다.'“어머, 관장님. 그런 일은 심미안을 가진 저를 시키셔야죠. 그림이라고는 화투하고 카드 밖에 모르는 과장님한테 너무 버거운 작업이에요.”'“아, 내 안목이 어디가 어때서? 그리고 이 화투하고 카드야 말로 모든 인생군상들이 집합해 있는 명작 중의 명작이라고. 어이, 양 대리 안 그래?”'창용은 동조를 요청하는 김 과장에게 멋쩍게 웃으며 소신을 밝혔다.'“심미안에게 도움을 좀 받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그, 그래?”'“제가 잘 도와드릴게요.”'“그럼 그러지 뭐.”'뒷심 무른 김 과장이 은주와 한 팀을 이루는 것에 합의하자 주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향음관 갑니다.”'“예. 다녀오세요.”'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사무실을 나선 주환은 관람객들로 북적이는 안뜰을 살폈다. 시음회를 하고 있을 줄 알았던 미호가 보이지 않았다. 시음회를 했던 기다란 탁자도 말끔하게 치워진 상태였다.'‘어디에 있는 거지?’'나른한 오후 참이니 제 일을 도우라는 핑계 삼아 같이 차 한 잔 했으면 싶은 주환은 안뜰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박물관을 먼저 살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곧잘 일을 거들러 가는 다화당에 있는 것이 아닌 가 싶어 그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러나 두 발짝도 못 가 그의 발걸음을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