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뿐사뿐 부드러이 걷는 발걸음. 하지만, 그 걸음에선 결코 가벼움이란 묻어나지 않는다. 까만 눈동자를 당당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에 항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햇빛에 반사되는 윤기 나는 길고 고운 흑발. 여린 몸을 휘감고 있는 아름다운 비단옷. 그리고 그녀의 이마 중앙에 작게 그려져 있는 붉은 꽃잎.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가린 옷을 가는 손끝으로 살짝 당겨 잡는 그녀의 모습에 시장터 같던 항구 안은 그녀가 지나갈 때 마다 고요해지는듯했다. 하지만, 곧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남았다.'“후작이나 될법하면 재산도 그럭저럭 있을 텐데…… 저리 예쁜 자기 자식을 팔아넘기고 싶을까?”'“사람 헤픈걸 봐야지…후작이면 뭘 하나, 도박으로 빚만 잔뜩 이라는데.”'“저 고운 면상 좀 보게나. 저게 독이구만 그래. 저러니 탐을 내지…쯧쯧. “'작게 속삭이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잔인하리만치 귓가에 또렷이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긴 속눈썹을 조용히 깜빡거리며 바삐 걸을 뿐, 다른 어느 곳에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혼인을 앞둔 몸이란 것을 나타내는 이마 중앙에 그려진 붉은 꽃잎은, 이상하게도 그녀의 외모와 잘 어우러져 사람들의 눈에 그녀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아가씨…괜찮으십니까?”'“…….”'계속해서 수근 대는 사람들의 말소리. 커다란 짐을 듬직하게 들고 자신의 뒤를 따라오며 묻는 수혁(守奕)에게, 아미(兒美)가 빙그레 웃어보였다.'“괜찮아, 지금 떠나면 그만인데 뭐.”'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애써 목소리를 밝게 내본다.'“…….”'그런 그녀를 알기에 수혁은 아미에게 더이상의 말을 던지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이내 자신들을 싣고 떠나야 할 커다란 배의 모습이 가까워져가자 아미는 순간 걸음을 멈춰버렸다.'“아가씨?”'그러자 그녀를 뒤따르던 수혁의 걸음도 자연스레 멈춰졌다. 배위를 바라보는 아미의 눈빛이 아련해져 있었다. 어딘가를 놀러가듯 웃으면서 즐겁게 배에 오르는 사람들. 꼬마아이들은 뭐가 좋은지 갑판위에서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장난을 즐기고 있었다. 우아하게 옷을 차려입은 여인네들은 나풀거리는 비단옷을 펄럭이며 수다를 떨기에 바빠 보였다. 어느 누구하나 세상시름을 어깨위에 얹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수혁아….”'그런 그들을 한참이나 꼿꼿하게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던 아미가 이내 입술을 달싹인다.  '“네가 같이 가서 다행이야…….”'속삭이듯 중얼거리는 아미의 말에 수혁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이제 내 인생이 바뀌겠지? 늙은 공작의 첩으로 들어가는 거니 돈은 많겠군.”'한마디 한마디를 조용히 읊조리던 아미가 끝내 코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씁쓸하게 바라보는 수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미는 입가에 웃음을 지어내며 떳떳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두 눈을 당당히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단호한 목소리.'“그게 내 운명이라면 도망치지 않고 갈 데까지 가보겠어.”'그 가녀린 몸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다른 사람 같으면 도망갈 궁리부터 할 텐데, 그녀는 오히려 어떤 것이든 맞서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아니면…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곳에 왔다는 것을 알고 무작정 부딪히겠다는 건지도. 아미가 천천히 발을 옮겨 배위로 향하는 첫걸음을 디뎠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수혁도 말없이 그 뒤를 따른다.'“…….”'당당해 보이려는 말투에 비해 자신을 앞서 가고 있는 아미의 어깨는 한없이 여려 보이고 그렇게 약해보일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보다는 남을 생각하던 여리지만, 강하던 아이가 아미 아니었던가. 보잘것없는 자신을 처음으로 사람대접 해준 것도 아미였다. 자신은 그저 그녀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랄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래서 수혁은 그녀가 떠나야하는 길을 자진해서 함께 걷기를 청했다.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서. 얼마만큼 왔을까- 커다란 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해서 그 속도의 빠르기를 느낄 수 없을 만큼 벌써 바다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는듯했다. 아미는 집에서부터 자신들의 뒤를 바짝 따라붙은 열 명 가까이 되는 칼로 무장한 남자들을 신경에 거슬린다는 듯 바라봤다. 집에서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미와 수혁을 정중하게 맞이한 그들은 공작의 명령으로 그들을 도착지까지 모시러 왔다는 것이었다. '흥! 혹시나 중간에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나 않을까 조바심이 나셨군.'아미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 뒤 선실 안을 빠져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온 걸까. 지긋지긋한 계부의 품에서 빠져나왔지만 자신은 이제 늙은 공작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자신의 인생을 삐딱하게 망쳐놓은 계부생각에 아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가씨.”'그녀의 어깨 뒤로 들려오는 따뜻한 목소리. 감았던 눈을 떠올리니 수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수혁아.”'“어지러우세요?”'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꼬옥 감고 있던 것이, 아마도 수혁으로 하여금 걱정을 끼친 모양이었다.'“아니야. 괜찮아.”'아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수혁에게 걱정 말라는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였다.'“들어가 누워계시지요. 아침에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으니 멀미가 나실 텐데.”'도리도리. 수혁의 상냥한 말에 아미는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아미는 오히려 자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뜻대로 들어주는 수혁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되는 싫은 길이, 못내 겁나고 두려워 그와의 동행을 허락하고 말았다. 수혁이라도 곁에 있어야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걸어 나와 유유히 돌아다니는 귀족들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갑판 끝자락에 도착한 아미는 수혁과 함께 바다를 바라봤다. 하늘이 심상치 않은 듯 검은 구름이 몰려있었다.'“비라도 오려나….”'아미의 공허한 눈이 불안한 듯 떨리자 수혁이 그녀의 곁에 바짝 다가섰다.'“지나가는 비가 올 듯합니다. 곧 쏟아질 것 같아요 들어가시죠.”'수혁이 갑작스레 꾸물거리는 하늘과 살며시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아미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수혁의 손길에 이끌려 아미가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이내, 톡톡- 한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는 빗줄기에 하나둘씩 선실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할 때였다.'“저, 저게 뭐지!”'어느 한사람의 고함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다시 바다로 향했다.'“저기 저 배 말이야!”'선실로 돌아가려던 사람들 모두가 한두 명씩 바다 저편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커다란 배를 보고 탄성을 터뜨렸고, 아미와 수혁도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커다란 배.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 걸려있는 깃발에는 위엄스런 용의 모습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아미의 두 눈이 놀라움에 커다랗게 될 무렵, 몇몇의 사람들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풍해(風海)단이다!”'“!”'“해적 풍해단이야!”'점점 가까워져오는 배. 그 뚜렷해져오는 모습에 사람들은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맙……소사.”'아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아가씨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