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소현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은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仁祖實錄 中''1646년 <인조 23년>''밤이 깊었다. 달빛 아래로 보이는 궁은 평온해 보였고 각 전각의 주인들은 저마다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단 한곳, 임금께서 계시는 대전은 여전히 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전하, 밤이 깊었습니다.”'턱을 괴고 앉아있는 왕을 향해 내관이 조심스레 아뢰었다. 하지만 왕은 도무지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축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전하, 행여 옥체라도 상하실까 걱정되옵니다.”'김 내관이 다시 허리를 숙이며 왕을 재촉했다. 그의 재촉에 못 이겨 미간사이로 주름을 잔뜩 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던 왕은 순간 아찔한 현기증에 몸을 휘청거렸다. 그의 곁으로 김 내관이 달려왔다.'“전하, 괜찮으시옵니까?”'“괜찮다. 소양의 처소로 가야겠구나. 차비를 하라.”'늙은 왕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왕의 행차를 알리기 위해 어린 나인이 대전을 빠져나가고 왕의 어가가 소양 조씨의 전각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오늘이 며칠이더냐?”'왕은 흔들리는 어가에 앉아 옆을 따르는 김 내관에게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스물 닷새 이옵니다.”'“스물 닷새라…….”'왕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아들 소현 세자가 죽은 지 1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10년 전, 청에 볼모로 끌려갔던 아들은 9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아들의 귀환. 하지만 왕은 반갑지 않았다. 아들은 훌륭하게 장성했고 장성한 아들은 아비의 자리를 위협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소현 세자를 소군(小君)이라 부르며 임금의 예우를 했고 지혜로운 세자를 향한 중신들의 신임은 두터웠다. 늙은 왕은 두려웠다. 인조가 누구인가? 반정(反正)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그는 언제나 자신의 위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다. 혹여 자신을 왕으로 세운 것처럼 중신들이 또 다른 왕을 내세우지는 않을까? 언제나 전전긍긍하던 그에게 아들 소현 세자는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는 지금껏 쌓아올린 자신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왕위는 위협받았고 늙은 왕의 머릿속으로 두려움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결국 왕은 아들을 독살했다. 아비에게 버림받은 아들은 얼굴가득 선혈을 흘리며 죽어갔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밤마다 피를 토하는 아들이 왕의 꿈속을 찾아왔다. '“스물 닷새라…….”'이틀 후면 아들이 죽은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후덥지근한 밤기운에도 불구하고 왕은 오한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어디 편찮으십니까?”'때늦은 왕의 방문에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소양이 맨발로 그를 맞았다. 그녀가 누웠던 이부자리는 따뜻한 온기로 채워져 있었다.'“오한이 느껴지는구나.”'늙은 왕과 애첩은 궁중의 예를 취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다만 남자와 여자일 뿐이었다. 서둘러 곤룡포를 벗어던진 왕은 소양이 덥혀놓은 이부자리에 몸을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