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 퍼런 하늘 아래 황궁의 누각이 거만하고도 우아한 곡선으로 하늘과 맞닿았다. 태화전의 뜰에는 천 명에 가까운 인영들이 저마다의 격식을 갖춘 복색을 차려입고 부부의 연을 맺는 대 상주국의 태자와 태자비를 우러러 보았다.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았다. 스산한 바람이 악기 소리를 흩어 버리고 낙엽을 쓸어 올릴 때마다 연주하는 악공들의 얼굴에는 경련이 일었고 음은 아슬아슬하게 선율을 비껴가곤 했다. ' 태자비 소군의 심장은 잘게 떨렸다. 그것은 비단 불안한 음 탓도 아니며, 용상에 앉아계신 황상의 파리한 안색 때문만도 아니었으며, 동정의 눈빛을 보내는 황후마마의 탓도 아니었다. 한창 추수가 끝나고 짧은 기쁨을 누리고 있어야 할 이 시기에 이토록 낯설고 두려운 곳에 마음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지내야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 자신의 낭군이자 앞으로 황상이 되실 태자 광운은 그녀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오기 전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태자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이곳에서 목숨만은 부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기를, 자신의 존재가 태자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 불안한 마음을 떨치려는 듯, 그는 궁에 들어올 때 마음먹었던 각오를 다시 한 번 새겼다.' ‘나는 전하의 신하요, 백성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황후가 될 태자비다.’' 그렇게 다짐하고 억지로 등을 곧추세워 보지만, 앳되고 고운 소군의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지고 메마른 의지만이 남았다. ' 태자 광운은 기어이 오늘을 맞이한 것이 원통했다. 붉은 비단 옷을 화려하게 차려 입고 머리에 금관을 두른 태자비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 자리에 세우고 싶었던 더 아름답고 선한 여인은 지금쯤 홀로 눈물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찾아가면 그런 일 없었다는 듯 환한 웃음으로 반길 것이다. ' ‘황위가 무엇이건데? 그 자리로 인해 과오를 범하고, 죄인 줄 알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밟아야 하는가.’ ' 태자와 태자비가 서로 마주하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태자는 오늘 처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자비의 눈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태자는 그녀의 분위기가 처음 보았을 때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무지하고 무례했던 그녀도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많이 바뀌어 있었다. 시선을 느낀 태자비가 눈을 들어올렸다. 태자는 그녀와 눈길이 얽힌 짧은 순간 흠칫 놀랐다.' 무표정한 얼굴과 혜안이 가득한 맑고 깊은 눈동자는 지난 번 보았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럴 리 없다.’' 분명 같은 얼굴이었다. 잘못 본 것이리라. 저도 모르게 불행한 그녀의 인생을 동정하느라 잠시 착각하였을 것이다. 방금 보았던 그 표정이 진실이라면 자신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했다. 아직 치기 어린 태자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고 애꿎은 태자비를 향해 어리석은 고집을 다짐했다.' ‘결코, 마음 한자락 주지 않으리라.’' 태자비가 이미 진즉에, 태자의 그 마음을 헤아리고 바라지도 않았던 그 마음 한 자락이 마음 전체가 되어 오롯이 그녀를 향하게 될 줄, 그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과 무수히 싸우게 될 줄, 이날은 생각지도 못했다.' 서늘한 바람이 태자와 태자비의 사이를 옷자락이 펄럭일 정도로 휩쓸고 지나갔다. 겨울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쓸쓸함이 사무치는 경사스러운 어느 날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