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조각난 약속

“삭이랑은 어떤 사이야? 두 사람… 사귀기로 했나?”

삭이 멀어지자마자 가로는 물었다. 그러나 설은 답 대신 질문을 선택했다.

“우리 아빠 사정은 어떻게 아신 거예요?”

“언제부터지? 삭이랑 카페에 함께 왔던 그 날부터인가?”

가로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숨기지 못하고 강하게 물어 왔다.

설은 그의 말투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최대한 흔들리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았다.

“우리 아빠 사정은 어떻게 아신 거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제가 지금 여기 있는 걸로 알고 있는 데요?”

“젠장! 질문은 내가 먼저 했어. 네가 답을 해야 나도 답을 할 거 아냐!”

내질러진 소리 때문에 가까이 앉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욕설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겨우 참은 가로는 두 눈이 커다랗게 떠진 설의 손목을 붙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프런트에 있던 종업원들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평소와 너무도 다른 가로의 모습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어두워진 밤거리를 한참 걷던 가로는 더 이상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지로 팔을 비틀어 빼는 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마음이 없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걷느라 가로의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그의 강제적인 이끌림을 좇느라 설의 숨도 차 있었다.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만 가보겠어요. 답을 듣지도 못한 채 소중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어요.”

설의 단호한 외침에 가로는 실소를 흘렸다. 왠지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슴이 아파왔다. 이런 만남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집안 일로 인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어깨를 짚어주고,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면, 염려하지 말라고 든든하게 일러주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의지를 받으며 자신의 마음을 마음껏 이야기해 주는 장면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 처음으로 한다는 말이 고작 삭과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었다. 젠장!

“그날… 피자가게에서 너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드디어 마음을 이야기하는 가로 때문에 설은 숨을 고르며 귀를 기울였다.

“평소의 내가 될 수 없었어. 마음에 누군가가 훅 하고 들어 온 게 처음이라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 처음엔 이런 마음이 뭔지 몰라서 당황했어. 그래, 그래서 너를 보면 화가 났어. 너를 생각할 때마다 이상하게 변해버리는 나인 것 같아서 싫었거든. 근데, 너를 보면 또 행복해져. 네가 웃는 모습 때문에 내가 웃게 되니까….”

설은 입술을 꼭 다문 채 숨죽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길게 심호흡을 한 다음, 설을 바라보았다. 이렇다 저렇다 할 표정을 짓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며 가로는 그녀가 궁금해 하는 바를 마저 설명하기로 했다.

“우연히 너의 통화내용을 듣게 되었어. 소울 프렌즈 연습 때문에 학교에 갔던 때였고. 그래서 난 더 자세히 알아 볼 수 있는 길을 찾았어. 도움을 주신 분 덕분에 내막을 알게 되었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도움을 준 것 뿐이야. 자, 이제 궁금증이 좀 풀렸나?”

설은 답이 없었다. 가로는 아무 말이 없는 그녀 때문에 갑갑함을 느꼈다. 이런 적이 없었다. 자신이 그럴 듯한 멘트와 함께 다가가면 여자들은 항상 웃었다. 항상 기뻐했다. 만족스러운 그 웃음까지는 아니라할지라도 반응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 가로는 설에게 다시 마음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내가 너에게 지적 질을 해 댄 건… 미안했어. 근데, 그게 실은 이런 마음이라서, 널 좋아하는….”

“좋아하는 마음이면…!”

가로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설의 떨리는 목소리가 강하게 튀어 나왔다. 가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설의 표정을 살폈다.

왜…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이렇게까지 해 준 남자에게 그녀는 왜 웃어주지도 않고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가로는 설이 다음에 할 말을 가늠하기 위해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정말로 모르겠다.

“좋아하는 마음이면 다 되는 거예요? 좋아하니까 마음대로 해 버려도 괜찮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가로는 설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너를 좋아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아드렸다.’ 그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는 ‘고맙다, 나도 네가 좋다.’여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하시네요. 받는 사람 입장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행동을 해 버릴 수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