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악(惡)’은 못마땅함을 가득 담은 채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성적폭행, 성추행, 강간, 간음, 동성애 등 최근 들어 세계 곳곳이 자신의 가치관을 따라 악행으로 무질서해지는 것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하는 손에 꼽히는 인물들이 여전히 있었다. 더러운 욕망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힘없는 인간인 주제에 자꾸만 ‘순결’을 붙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 몇몇 때문에 악은 오늘도 그 아름다운 얼굴을 굳이 일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192번째 군단에 속해 있는 아이 하나가 ‘원수’의 전에서 알아낸 정보를 전해 왔습니다.”

악은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며 따르는 이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악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고, ‘원수’가 만든 세상이 보기 좋게 멸망하는 것을 꿈꾸는 이들이었다.

“무엇을 알아냈다고 하더냐?”

“원수가 어느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유독 환한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원수’라 부르는 이는 인간세상을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곳으로 만들었던 이였다. 그러나 그 원수는 요즘 심기가 많이 불편할 것이다. 악이 그를 배반했고, 그가 사랑했던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고 있으니 말이다.

악은 그것이 정말로 신이 났다. 혼자만 우뚝 솟아 세상을 주관하는 그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에 품게 된 미움은 그의 아픔을 즐거워하고, 세상을 망가뜨리는 재미에 빠져들게 했다. 그래서 악은 그가 가슴 아파할 일들을 부지런히 만들었다. 악과 그의 수하들은 세상 어떤 존재보다도 부지런하고 영리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전략과 부지런함으로 세상은 원수의 가슴을 찢어 놓을 만큼 타락했다. 그들의 타락한 모습에 원수는 분노했었다.

‘이제 세상은 끝장난 거야. 원수의 솜씨가 다 어그러진 거야!’

그렇게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하던 악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배신당한 원수가 볼품없어 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세상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희열이었다.

그러나 악은 분노하는 원수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턱을 달달달 떨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만든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기도 하고, 유황불로 태워 버리기도 하는 분노의 자태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하고 삼켰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악의 근원적인 두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타락한 세상을 위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대신 죽임으로 인해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한 원수의 계획과 실행에 악은 온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는 두려운 이였다. 타락한 인간들의 죄상이 끔찍이 싫으면서도 그 인간들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는 원수가 악은 너무도 싫었다.

악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배반과 세상을 타락시킨 만행에 대해 원수가 더 이상 참지 못하는 그 때가 되면 자신의 모든 것이 그쳐질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악은 초조했다. 그가 두고 보는 이 시간 안에 모든 세상을 그가 싫어하는 모양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그 일이 생각보다 잘 진행되고 있었다. 곳곳에 있는 몇몇 사람만 아니라면 말이다.

“이신호의 아들, ‘이삭’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이신호…? 악은 치가 떨리는 그 이름에 아랫니를 깨물었다. 30여년 전, 욕망의 굴레로 그를 에워쌌던 때가 기억났다. 그의 주변에 있는 한 여인을 흠모하기에 그녀를 상대로 참을 수 없는 욕정을 품게 했다. 너무도 쉽게 넘어온 그 자는 ‘결혼’이라는 테두리 없이 그녀를 안았다.

그는 원수를 향한 신앙이 두터운 어느 여인의 아들이었고,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철저히 받았던 인물이었다. 아무도 그가 그럴 거라고 예측조차 하지 않았던 인물이었기에 그의 넘어짐은 악과 그의 수하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었었다.

그런데,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신호가 자신의 실수로 얻게 된 아들을 품에 안으면서 ‘원수의 아들’과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원수의 아들은 직접 이신호에게 찾아갔고, 이신호는 그와 만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죄를 모두 고백했고, 용서받았으며 새롭게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그 때부터 그는 아들 이삭을 ‘원수를 사랑하는 이’로 키우기 위해 정성을 다했으며, 욕망의 세계와 벽을 쌓기 시작했다. 쉽게 넘어온 만큼 효용가치가 클 줄 알았던 이신호는 자신의 아들을 원수의 가치관으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상담학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고서 상당수의 청년들에게 ‘순결’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악은 그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 넘어왔던 자를 또 다시 넘어뜨리는 일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시간과 치밀함이 좀 필요한 인물이어서 귀찮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원수가 그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 지을수록 그에 대한 집착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이신호의 아들인 이삭이 원수의 마음을 흡족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자인가?”

“올 해 서른이며 미혼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혼전관계를 한 적이 없는 자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악은 의아한 눈빛으로 보고를 하는 이를 바라보았다. 보고 하는 이는 분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 세찬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온 세상에 ‘혼전, 혼외 관계가 사랑이 있든 없든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가치관을 열심히 심어 두었는데, 그 와중에 또 고집을 피우는 녀석이 생겨 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