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밭을 거니는 한경을 따라 마치 노아의 홍수처럼 인파가 갈라졌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캐리의 신곡. 그 어느 곳에서도 울린 적이 없는 아름다운 멜로디. 지켜보는 모두의 숨결이 흥분으로 들떠 어둠이 내려앉은 가든 가득 열기가 넘쳐흘렀다. '와인 잔을 쥔 웨인의 손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어떻게 저런 곡을 만들 수가 있지? 모두가 캐리의 바이올린 연주곡을 천상의 소리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이곡을 듣기 전에나 할 수 있는 오보였다. 이것이야 말로 지상에선 들을 수 없는 신의 음악이었다.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사랑의 세레나데. 오직 그대만을 위해 내가 살아 있음을 일깨워 주는 아름다운 속삭임. 여태 이런 곡은 없었다. 웨인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무척 격양되어 있었다. 이래서 널 포기할 수 없는 거다. 캐리. 한경을 바라보는 웨인의 눈이 탐욕을 넘어 경이로움을 담아내고 있었다. '“어떻게…….”'믿을 수가 없었다. 캐리가, 이유주만을 사랑하던 캐리가 어떻게 다른 여자를 위해 연주를 할 수 있단 말인지. 유주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십 년이란 세월을 캐리의 연인이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지냈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만든 곡들은 하나같이 협주곡이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미완성이 되고 마는 그런 곡들이었다.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진실한 사랑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건 거짓말이다. '계단을 오르는 캐리의 눈은 오직 한 여자만을 담아내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아무것도 아닌 일게 기획자를 온 마음을 다해 온 정성을 다해 간절히 원하고 바라고 사랑한다 말하고 있었다. 국왕조차도 쉽게 들을 수 없는 그의 연주를 저런 천한 여자를 위해 들려주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레스를 움켜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유주가 질투에 눈먼 시선으로 현주를 노려보았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캐리를 바라보고 있는 한현주를.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 나타난 거지?”'준혁이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로 이를 뿌득 갈아대며 말했다. 유주의 눈이 날카롭게 준혁을 쏘아보았다. 캐리는 아무나 저 녀석이라고 불러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준혁이라고 해도 말이다. 캐리를 욕하고 막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어야 했다. 비록 버리고 떠났다 할지라도 한때 사랑했던 연인으로서. 절대 잊지 못 할 거라 여겼던 하나 뿐인 사랑으로서. '“아는 사이예요?”'유주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준혁이 캐리를 어떻게 안단 말이지?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캐리가 모든 사람이 알만큼 널리 알려진 인물도 아니고.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 죽기 전 꼭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추앙받는 존재인 그를. 어떻게 음악엔 그다지 관심도 없는 준혁이 알 수 있단 말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묻는 유주의 말에 준혁이 아무렇지 않게 툭 말을 뱉어냈다. '“한 실장이 심심풀이로 만나는 떨거지 새끼.”'“뭐……라구요?”'“어?”'유주의 말투가 조금 이상했던지 준혁이 그제야 그녀를 돌아보며 어눌하게 물었다. 유주가 잔뜩 굳어진 얼굴을 억지로 움직여 미소를 그려냈다. 가늘게 떨리는 유주의 입가를 채 알아채지 못한 준혁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 녀석에 대해서 물은 거 아냐?”'“저 녀석 아니고 캐리 테드 그라니스예요.”'“캐. 뭐?”'무식한 사람. 유주의 눈빛이 준혁이 눈치 채지 못하게 차갑게 내려앉았다가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피아니스트 이유주의 약혼자라는 명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캐리 테드 그라니스.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모나코가 사랑하는 신의 선물. 저 사람이 바로 캐리예요.”'유주의 시선이 놀라 입만 뻥긋거리는 준혁을 떠나 단상에 오른 캐리에게로 향했다. 그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된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가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에 겨운 선율을 들려주는 사람. 그가 바로 캐리. 저 사람이다. 그래서 끌렸고 그래서 사랑했다. 그래, 처음엔 그저 순수하게 그의 음악에만 끌렸었다. 세상에 물들기 전에, 그의 그늘에 가려 숨이 막히기 전엔 그랬었다. '현주의 눈엔 오로지 한경만 보였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름다운 한경의 모습만 눈에 담아냈다. 처음 들어 보는 그의 음악은 소름이 끼칠 만큼 전율적이고 아름다웠다. 나만을 위한. 조한경이 한현주를 위해 연주하는 바이올린. 그래서 더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고 감사했다. '단상에 오른 한경이 현주 앞에 멈춰 섰다. 그녀를 보고 그녀를 담고 그녀를 위해 바이올린을 켠다. 사랑이 빗방울처럼 촉촉이 내려와 내 몸을 빈틈없이 적시고 심장으로 스며든다. 온통 너로 물든 심장은 이제 네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말한다. 내 심장은 오직 너만을 위해 뛰고 달리고 사랑한다고 끝없이 속삭인다. '한경이 활을 거두고 바이올린을 내렸다. 쥐 죽은 듯 고요하던 장내가 다시 열화와 같은 갈채로 가득 찼다. 단상 위 한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경이로움으로 빛났다. 동경과 찬사가 연이어 이어지고 위원회 회장이 급히 꽃다발을 들고 단상으로 올라왔다.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건네며 꽃다발을 내미는 회장을 무시한 채 한경은 여전히 현주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세기의 바이올리니스트 캐리 테드 그라니스 씨.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웨인.”'한경이 활과 바이올린을 한 손에 쥐고 팔을 쭉 뻗은 채 웨인을 불렀다. 현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가 그대로 손을 쫙 펼쳤다.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지상 최대의 바이올린 명품을 보며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에 가까운 비명을 질러댔다. 바닥에 떨어져 흠집이라도 난다면…….'다행히 그 전에 캐리의 행동에 주목하고 있던 웨인이 바로 단상 아래로 다가와 있었다. 몸을 날려 캐리의 바이올린을 붙잡은 웨인의 입에서 십년감수했다는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언제 룸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챙긴 것일까? 웨인이 방을 비운 건 고작 한 시간 전이었다. 거실 중앙의 테이블 위에 캐리의 바이올린을 올려놓았었다. 예전에 그가 간과했던 어쩌면이 오늘은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프런트에 키를 맡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쩌면이 역시나가 되는 순간. 확실히 캐리는 그의 레이더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늘 하던 행동 패턴이 아닌 어쩌면으로 이어지는 캐리가 아닌 한경의 새로운 패턴. 그 가운데 이제는 한현주라는 여자가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웨인은 단상 위의 둘을 바라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위원회 회장의 낯이 붉게 물들어 가는 사이 먼저 이성을 찾은 건 그래도 현주였다. 파티 플래너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주춤하며 회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난처한 빛이 역력한 현주의 얼굴을 보며 한경이 그녀의 볼을 한 손으로 감싸며 자신을 보도록 만들었다. 그리곤 회장을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여 인사를 한 뒤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불쾌했던 감정도 잊고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는 회장을 따라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박수갈채를 보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경이의 마음을 담아 보내는 감사의 인사였다. '“들어줘서 고마워. 도돌이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