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 얘, 너 눈이 진짜 예쁘구나. 난 너처럼 예쁜 눈을 한 사람은 처음 봐.

그것이 그 애가 나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내게 그런 말을 해 준 첫 사람이었다.

아니,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귓가를 간질이던 봄바람의 향기를. 어디선가 퐁당거리던 잉어의 꼬릿짓 소리를. 정수리에 내리꽂히던 햇볕의 따가움을.

아이는 조그마한 손을 들어 내 눈꺼풀을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계집애의 색동옷이 아프도록 선명하게 시야에 박혔다. 하늘빛도 신록의 연둣빛도 흐드러진 분홍빛도 아이의 색동 소맷자락에 다 파묻혔다.

열세 해 동안 무채색으로 어둡게 덮여 있던 나의 세상에 돌연 꽃빛깔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아도 아이가 전해 준 색이 사라지지 않고 심장을 가득 채웠다.

빛은,

그렇게 내게 왔다.

#1

“아버님, 소자는 우둔하여 도무지 아버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다과상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창호지를 통과한 초봄의 약한 햇살이 방 안을 미지근하게 데우는 중이었다. 젊은 선비 민명하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그간의 불만을 털어놓기로 하였다.

명하의 아버지 민우상 공은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아들이 말을 잇기로 기다렸다. 그가 오래 참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예하의 나이 이제 열여덟이나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아직도 유안을 그 아이의 곁에 두시는 것입니까? 소자, 세간의 소문이 두려워 벗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저어됩니다.”

아들의 근심 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민 공은 잠소(潛笑)하였다.

“세간의 소문이라니. 유안은 집 안에서만 예하와 함께 있는 것 아니냐. 바깥출입을 할 때면 몸을 완전히 숨기거늘 무엇이 그리 염려되더냐.”

명하는 눈을 방바닥으로 향하며 찡그렸다.

아버님께서 저리 모르는 척하신다면 곤란하다. 차마 입 밖으로 내어 여쭙기에는 민망하고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걱정하는 것은 남들의 입방아 따위가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까지 모른 척하지는 않았다.

“예하와 유안은 친남매간이나 다름없다. 네가 우려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이니, 너무 초조로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명하를 안심시키고자 함이었고 그 음성 또한 태연하였다. 그러나 말을 들은 아들은 오히려 경악했다.

“친남매라니, 말씀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무리 함께 자라다시피 하였어도 반상의 구별과 신분의 고하가 분명하거늘, 어찌 예하가 저 눈 푸른 상것의 누이 취급을 받는다는 말씀입니까. 저 아이는 아버님의 금지옥엽이자 제 하나뿐인 동기가 아닙니까.”

불쾌감으로 굳어진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은 너그러웠다. 명하가 유안의 존재를 마뜩잖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나이 찬 여아의 곁에 장성한 사내가 따라다니는 건 누가 생각해도 괴이한 일이었다.

민 공은 가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 훨씬 편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은 말해 줄 때가 아닌 터. 그리고 아들이 알 필요가 없는 게 다행스러운 상황. 그는 명하와의 대화를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예하가 시집을 가면 너와의 물리적인 인연은 거지반 끊어질 것이다. 허나 유안은 예하를 따라갈 터이니, 이 험한 세상에서 예하를 지켜 줄 오라비는 유안이라 하여도 될 만하지 않겠느냐. 신분이나 혈연을 말한 게 아니라 저 아이의 버팀목이 되어 준다는 의미에서 남매라 한 것이니 너무 언짢아하지 말거라.”

다독이는 듯 단호한 아버지의 말씀에 명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버님, 그 무슨…….”

민 공은 대답 없이 서안의 책을 펼치며 표정으로 ‘이제 그만.’ 하고 선언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명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발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혹을 떼러 갔다가 붙이고 온 기분이었다. 아니,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