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야아! 송나리!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아직도 퍼져 자고 있는 거야?

“으으응, 왜?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떠지지 않는 눈을 그대로 둔 채 누워서 나른한 목소리로 나리가 웅얼거렸다.

-넌 친구라는 지지배가! 내가 어제 얼마나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줄 알아? 근데 이렇게 퍼져 있으면 어떡해. 흐허엉.

“……?”

나리는 며칠 동안 꽉 막혀 써지지 않던 글이 간만에 발동이 걸려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런데 간신히 잠든 지 한 시간 만에 친구 영란의 전화를 받은 상태였다.

-네가 그러고도 친구야? 이 나쁜 지지배, 송사리! 흑흑흑.

송사리! 지금 영란이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화가 많이 났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했다. 영란은 화가 나면 나리의 이름을 송사리라고 부르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느닷없는 친구의 울음보에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또다시 속사포처럼 퍼부어 대는 영란에게 화가 날 법도 한데 나리는 익숙한 듯 덤덤했다.

전화를 받은 채로 떠지지 않은 눈을 한 손으로 비비며 일어나 냉장고로 걸어가 물병을 집어 들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영란아,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이 난리야?”

나리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괜찮을 거라며? 믿어도 된다며?

“왜? 우식이가 바람이라도 피웠어?”

나리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무덤덤했다.

-그래, 그래! 어제 어떤 여자랑 밤에 술 마시는 걸 동네 아줌마가 봤대.

“……같이 술 마셨다고 다 바람이냐? 술이야 뭐 같이 마실 수도 있지. 진정해. 친구야.”

그 말을 들은 나리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곤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영란을 진정시켰다.

-술만 마셨으면 내가 이러겠어? 그 소리 듣고 내가 쫓아가 봤는데. 글쎄, ……어디로 들어갔는지 알아?

“……?”

-……모, 모텔! 모텔로 들어가더라. 정말 내가 흥분 안 하게 생겼나 봐! 최우식! 이 노무시끼 미친 거 아니니?

“풉! 뭐? 모, 모텔?”

나리는 모텔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미 입 안의 물을 분사하듯이 뿜어냈다.

모텔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비몽사몽이던 나리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식은 친구인 영란의 남편이기도 했지만, 나리에겐 초등학교부터 한동네에서 친하게 지낸 동창이자 각별한 친구였다.

-그래. 모텔.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흐허엉.

영란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잠이 깨자마자 펼쳐진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나리는 난감했다. 영란 부부는 나리에겐 둘 다 소중한 친구였다.

대학 친구인 영란을 초등학교 동창이자 절친인 우식이랑 소개시켜 준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됐고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골인을 했다.

처음엔 그렇게까지 성사될 줄 몰랐고 나리에게 둘 다 소중한 친구인 영란과 우식이 부부가 된 것이 나름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사소한 일로 둘이 다툼이 있을 때마다 본의 아니게 괴롭힘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직 결혼을 해 보지 못한 나리가 이해하기엔 결혼 생활은 정말 이해 불가한 것이 너무 많았다. 정말 별것도 아닌 일로 불같이 싸웠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닭살 행각을 펼치기도 했다. 어느 순간 나리는 둘을 이해하는 것을 서서히 포기했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영란이 싸움을 하고 나면 나리에게 하소연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 버린 상황이라 오늘의 일도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모텔! 모텔이라니! 아무리 우식이 나리의 어릴 적부터 절친이라 하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나리는 우식의 친구이기도 했지만, 영란의 친구이기도 했다. 거기에다 같은 여자이기도 했다. 나리는 잔뜩 열 받은 표정으로 물었다.

“우식이는 뭐래?”

-뭐라긴. 집에서 코 골고 냅다 자고 있지. 꼴도 보기 싫어서 그냥 나와 버렸어. 흐허엉.

영란은 아직 분이 안 풀렸는지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더 화가 치밀었다.

“넌 지금 어디야?”

-그냥 밖이야. 정신없이 걸어서 모르겠어. 잠깐만. 아! 저 건물? 나 아무래도 너네 동네로 왔나 봐.

“잘됐네. 그럼 우리 집으로 와.”

-흐흑, 흑. 알았어. 금방 갈게.

영란과 전화를 끊은 나리는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가 치밀었다. 친한 친구 영란의 일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화의 원인은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우식에 대한 인간적인 실망과 배신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