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환독(桓毒)

한 찰나 서재 안의 모든 것이 정적으로 얼어붙었다. 뒤이어,

“커헉!”

목을 부여잡고 삼킨 것을 마저 토하려 애쓰는 황제의 신음 소리가 쨍하니 울려 퍼졌다. 그가 사레들린 줄 알고 부랴부랴 등을 두드려 주려고 다가서는 궁정을 보며 문경도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으나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에 쭈뼛쭈뼛 머리털이 곤두섰다. 별안간 기척을 드러낸 그림자가 한마디 속삭인 것은 그때였다.

“바닥을 보십시오.”

문경은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그림자가 지목한 것을 확인하는 순간 아직도 어리둥절하기만 한 눈 속으로 뒤통수를 세게 내려치는 깨달음이 퍼졌다. 서재의 반질반질한 목재 바닥에 어지러이 엎질러진 산삼차의 흔적. 그중 별나게 거무튀튀하게 얼룩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방금 황제가…….

“피, 피가, 폐하, 피를……!”

뒤늦게 황제의 입가에 맺혀 떨어지려 하는 붉은 액체를 본 궁정에게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혼이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문경을 돌아보았다. 핏발이 맺힌 눈으로 그는 단호하게 고갯짓했다. 제꺽 뜻한 바를 알아들은 문경이 입을 앙다물며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다시금 혼이 목을 가다듬어 뱉어 낸 것이 선홍색으로 얼룩진 것을 보고 얼굴이 푸르다 못해 시커메졌다. 거칠게 얼굴을 비비는 것으로 아찔한 순간을 넘긴 문경은 혼을 부축하며 버티실 수 있느냐 여쭈었다.

“……뭔지 알아.”

바싹 잠겨든 목을 틔워 혼이 입을 열었다. 그는 아직도 움켜쥐고 있는 찻잔을 들여다보며 얼마쯤 웃기까지 했다.

“이대로 죽을 일은 없으니 표정 수습하게. 소란 부리지 말고 나가서 이 짓을 벌인 놈을 잡아내. 틀림없이 멀지 않은 곳에서 추이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당연히 잡아낼 것이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서둘러 환궁부터 하심이……?”

“죽지 않을 거라 했잖나. 멍청하게 굴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난 저 바깥의 사람들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걸 원치 않아. 조용히 범인을 보고 싶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비록 덤덤히 말하고 있긴 해도 목소리가 갈라져 잦아들고 있었다. 문경은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이 뛰는 심장을 의식하면서 어떻게든 하겠노라 다짐하고 일어섰다. 뒤에서 나직한 당부가 들려왔다.

“찻잔을 건드린 놈을 찾게. 천자가 내린 하사품이야. 거친 손이라고 해야 몇 명 되지 않을 걸세.”

“신에게 맡기시고 조금이라도 편히 계시옵소서.”

굳게 고개를 끄덕인 문경은 그림자와도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문을 나서는 그의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이글거렸다.

세 사람이 같은 차를 마셨으나 한 사람만 탈이 났다. 의심이 찻잔으로 쏠리는 것이 합당했다. 애초에 궁정이라면 그 찻잔을 골라 황제에게 올릴 거라는 것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혼의 말대로 그만한 물건인 걸 아는 사람은 많을지라도 실제로 손댈 수 있는 사람에는 한계가 있었을 터.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그놈을 고이 살려서 황제의 앞으로 데려가는 일이었다. 발각된 자객이 자결할 우려에 앞서, 제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은 걸 어찌 참을지 벌써부터 문경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수신호로 불러 모은 시위들에게 문경이 목소리를 낮춰 지시를 내리는 동안 같은 빛깔의 안개가 고요히 시위들 속으로 퍼져 갔다. 한바탕 휘저어 피바람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야수들에게서 마찬가지로 이를 드러낸 제 모습을 확인한 문경이 좌우 시위의 어깨를 꽉 잡았다 놓으며 말했다.

“그놈을 잡되, 일이 커져선 안 돼. 조용히. 폐하께선 조용히 범인을 보길 원하셨다. 알겠나? 발톱은 집어넣었다가 딱 필요할 때만 꺼내 들란 말이야.”

“염려 마십시오, 대장. 그만한 깜냥 없이 이 자리에 선 자가 어디 있습니까?”

“다시 멋지게 해보이겠습니다.”

시위들 중에는 히죽이는 자도 있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같이 두 주먹 불끈 쥐고 어서 움직이고 싶어 안달인 것은 더하고 덜할 바가 없다. 당금 천자가 즉위 초부터 사오 년이 지날 무렵까지 십여 건의 암살 시도에 시달렸던―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자잘한 것까지 합하면 서른 건도 너끈히 넘는다―때를 지나 평탄한 나날을 보내왔음에도 속으론 은근히 이런 일이 일어나길 바랐던 것은 아닌가 싶어 슬그머니 화가 치밀 지경이다. 문 안쪽에는 방금 독살의 위험에 처했던 황제가 있건만.

‘쳇, 불패불사(不敗不死)라 이거지.’

“지금부터 한 시진을 주겠다. 명심해라, 천자의 곁에 무능한 시위는 필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