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장''''연산왕 즉위년 12월 25일(경진) 빈전에 조전(朝奠)할 적에, 백관이 들어와 임하였다. '도감당상 이극돈등이 인수대비에게 아뢰기를 '“염습(瀲襲)이 모든 일은 정침(正寢)에서 집행하소서.”하니, '그리하라고 전교(傳敎)하였다.' '1494, 갑인년(甲寅年) 가을,'단풍 빛깔이 시나브로 옅어지고 갈참나무 잎이 갈색으로 변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서리가 간간히 피니 가을걷이가 시작된 지 꽤 되었다. 된서리가 내리기 전에 밭곡식부터 거두어들여 갈무리를 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농부들 입에서 풍월가가 읊어지고 그네들의 손이 흥에 겨워 빨라질 때쯤이면 하얀 눈꽃처럼 내려앉은 서리가 산사의 아침을 한 폭의 수묵화로 만들었다.'뾰족하게 솟은 기암괴석(奇岩怪石) 사이로 얼기설기 엉켜있던 퍼런 나뭇잎들이 서리에 홍건이 젖더니 어느새 울긋불긋 형형색색으로 서서히 물들어갔다.'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바람이 산 숲을 가르며 떠돌아 다녔다. 습기 먹은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은 산사의 처마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풍경(風磬)을 차가운 바람이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처마 끝에 고즈넉이 내려앉은 쓸쓸한 고요가 풍경소리에 산산이 부서졌다. 산사를 밝히는 불빛은 창호지를 뚫고 나온 호롱불 하나와 희붐하게 빛나는 별들뿐이었다. '어스름하기만한 밤, '붉은 호롱불의 기운이 삐걱거리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흔들거리는 창호문의 틈새로 새어나와 마당을 밝혔다. 문이 열리자, 불쑥 민머리가 나오더니 불혹이 조금 넘어 보이는 스님의 근심 어린 얼굴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현덕(顯德)이라 불리는 스님이었다. '산바람에 검게 탄 얼굴이 어둠에 스며드니 안광만이 푸른빛을 띠었다. 그의 나이 이순(耳順: 60세)이 넘었으나, 아무도 그의 나이를 짐작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산세와 사시사철 향기롭고 시원한 공기 덕분인지, 그도 아니면 세월이 그에게만 관대해지기로 작정했는지, 불혹이 된 이후로 바람과 해는 스치듯 말없이 지나갔다. 주름지지 않은 그의 생김새는, 스님이라 삭발(削髮)을 하였으나,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한 것이 야무진 이마와 상대를 압도하는 강한 눈빛으로 인해 강인한 장부를 연상케 했고, 잡초덤불처럼 탑삭나룻을 기르고 산길을 나서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은 산적이라 오해하고 혼비백산 달아날 것이 뻔했다. 일어선 키가 육척은 넘었다. 만약 전장(戰場)에서 선봉장으로 나선다면 적군의 오금을 저리게 하고도 남았으리라. '현덕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청명한 늦가을의 바람을 들이마셨다. 시원한 소나무향이 오장육부에 스며들자 심신이 나른해져 절로 하품이 새어나왔다. 그는 새어나오는 하품을 입으로 감추고 근심 깃든 주의 깊은 눈으로 암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팽팽한 얼굴에 굵은 주름 하나가 그어졌다. 식후에 사라진 늙은 스승이 보이지 않아 그는 마음이 다급해졌다.'“몸도 편치 않으신데 어디 가신 겐지…….”'생김새답지 않게 세심한 면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스승 걱정으로 그의 얼굴은 한가득 근심이 스며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