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너의 기억을 남겨둔 건 그래야 이 세상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야. 에모,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란다.』

전쟁은 승리하였으나 밀 농사는 폭망이라! 용사와의 싸움에서 진 마왕이 죽기 직전 뿌린 저주로 대기근이 든 리폴카 제국. 나 에우데모니아 플레누스는 대륙의 식문화 발전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전생의 지식을 간직한 채 이 땅에 태어났다!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으면서도 감자도, 고구마도, 토마토도 먹지 않는데……. 꼬마 영주님의 대륙판 ‘삼시 세끼’ 프로젝트!

“아기씨는 식복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저의 힘이 강하지 않아 환영을 오래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생전 본 적 없는 수많은 음식들이 아기씨의 미래에 존재했습니다. 평생 굶지 않고 맛있는 걸 잔뜩 먹으며 사실 겁니다.”

정신만 전생의 성인이면 뭐하나, 몸은 아기인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아웅, 큰일이다!

2. 작가 소개

양효진

1989년 3월, 절과 돌탑, 왕릉이 많은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

그 전에는 남들처럼 먹고, 자고, 공부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충실한 지금이 만족스럽답니다.

현재 대한민국 어딘가에 있는 해가 잘 들어오는 집에서

매일매일 마감에 쫓기는 삶을 사는 중.

▣ 출간작

엘샤 꽃나무 아래에 앉아서

계약의 목걸이

너의 온기에 안기다

눈부신 그대

파란만장 태자호위담

그는 내 심장을 뛰게 한다

내 꿈으로 놀러 와요

아이고, 폐하!

드라마틱!

헤스키츠 제국 아카데미(공저)

차아제국 열애사(공저)

허니 앤 베어(공저)

마음을 낚는 이야기꾼 웹소설 작가 되기(공저)

하늘 창 (공동저작 단편모음집)

겨울엔딩 (공동저작 단편모음집)

3. 차례

#11. 아기씨의 증명

#12. 성난 멧돼지에게 이겼노라

#13. 뛰는 놈 위에 나는 아기씨

#14. 동토로 가자! 반지 원정대

#15. 키워서 먹어라! 에모의 봄

4. 미리 보기

몇 시간째 대치하고 있지만 어느 쪽도 선뜻 공격을 하려고 나서지는 못했다. 신경이 갉아먹히는 느낌을 실시간으로 체험하며 호르데움 플레누스 자작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어우씨, 망할 영감. 식량 준다는데 왜 똥고집이야!”

“아무래도 밥을 너무 오래 굶어서 뇌가 맛이 간 거 같은데요.”

“생각의 구조가 참 독특합니다. 으하하하하!”

참모에 기사단장까지. 모두가 입을 모아 투덜거렸다. 이쪽에서 상당히 좋은 조건을 제시했고 실제로 저쪽의 참모와 기사들이 혹해서 동요도 일어났다. 하지만 군을 이끌고 있는 리어펠 백작이 요지부동이었다.

“식량 생산량이 높은 영지를 자기 걸로 만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여기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나 참, 리어펠까지 쌀하고 밀, 콩을 옮기는 비용은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나? 부채도 많다고 들었는데 전쟁은 어떻게 준비했는지.”

“군량은 밀고 오면서 근방 창고를 전부 털었답니다.”

안 싸우고 싶은데, 보아하니 싸워서 이겨야 될 거 같았다. 농번기의 전쟁은 플레누스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식량을 사겠다고 요청한 가문들이 지금 리어펠 백작을 어마어마한 기세로 비난하고 있었다.

“황자님들이 동부로 내려오는 그런 사태 따위, 정말 피하고 싶은데.”

“동감입니다. 돈하고 식량을 몽땅 털어갈 게 뻔한데 말이죠. 특히 설탕공장은, 으으으.”

“우리 에모가 키운 사탕무로 만든 걸세. 그 작은 손으로 정원에 열심히 길러서 씨를 받았다고! 이제 돈 좀 벌어 광명 보나 했더니.”

“행복 뒤 불행 시작인 건가요. 어라, 근데 해바라기들이 좀 이상하네?”

기사단장의 말에 사람들이 전부 해바라기 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게 잎을 세운 채로 경계를 하던 해바라기 꽃들이 놀랍게도 사람이 얼굴을 드는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았다.

“텔레포트, 으아아!”

번쩍거리는 마나의 흐름과 함께 나타는 건 네 명의 사람이었다. 익숙한 로브를 입은 사내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아기씨!”

“에모가 왜 저기 있어! 아이고, 우리 아기!”

아버지인 플레누스 자작이 펄쩍 뛰었다. 안전한 저택에 있어야 할 장녀가 갑자기 전쟁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 이곳에 나타났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딸이 곧 동그랗게 손을 모으고 소리쳤다.

“내 이름은 에우데모니아 플레누스! 플레누스 자작의 장녀이며 롬디아의 영주입니다.”

목소리가 해바라기 밭 전체에 울릴 정도로 큰 걸 보니 마법을 쓴 모양이었다. 뛰쳐나가려는 영주를 붙잡은 기사단장이 주변 사람들에게 재빠르게 눈짓을 했다. 여차하면 공격할 준비를 하라는 거였다.

“부모님이 알려주셨는데 리어펠 영지의 문제는 식량부족이라더군요. 배가 고프면 힘들고 오래 굶으면 죽어요. 하지만 전쟁이 나면 굶어 죽는 사람들보다 전사하는 병사의 수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당당하게 외치는 모습을 보고 양 진영의 병사들이 입을 떡 벌렸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하는 말은 완전 어른이었다.

“헐, 우리 아기씨. 완전 똑똑해.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 보니까 새삼 또 느낀다.”

“무서워하지도 않고, 진짜 간이 이 해바라기 밭 크기 정도는 되시는 듯.”

무기를 들고 있던 병사들이 소곤거리는 말을 들으며 각 부대의 대장들이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여덟 살짜리는 저렇게 말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리어펠 쪽에서 백작이 말을 몰아 조금 앞으로 나왔다.

“네가 그 유명한 설탕 아기씨구나. 나도 신문을 보았지. 너처럼 어린아이에게 검을 든다면 나는 기사라고 할 수 없을 거다.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자 에모는 귀를 꾹 막은 다음 고개를 휙 돌렸다.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뜻이었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확실하게 의사표시를 했다.

“제가 리어펠 영지의 식량난을 해결해드릴 수 있어요!”

그 말에 리어펠 백작의 눈이 커졌다.

식량난. 모든 게 다 그놈의 식량난 때문이었다. 밀 농사가 흉작이 되면서 곡식의 가격은 올랐고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 수 없는 상황이 속출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리어펠 백작은 천생 군인으로 자라고 살아온 인물이라 거래에 능하지도 못했다.

농토가 거의 없는 영지가 원망스러워진 적은 살아오면서 처음이었다. 그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영지민들이 굶주림에 견디지 못해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마왕과 싸울 때보다 더 큰 절망을 느꼈다.

“네가 어떻게 식량난을 해결한다는 거냐. 나도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았어! 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 리어펠 영지는 플레누스와 다르다. 산속에 만들어진 곳이라 밭이 거의 없어. 개간을 하려고 해도 엄청난 노동력이 들뿐더러 산을 깎아 밭을 만들면 자칫하다가는 여름에 산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단 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에게 왕왕 소리를 지르는 백작을 보고 플레누스 자작은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그래서 말리는 부하들을 휙휙 던져버리고 참모가 들고 있던 확성기를 뺏어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영감! 내 딸한테 소리 지르지 마쇼!”

“호르데움! 자네는 이 맹랑한 애나 데려가! 도대체 영지 경비를 어떻게 하고 있기에 애가 여기까지 오는데 막는 사람 하나 없었던 건가!”

“저기, 안 막은 건 아닙니다. 그냥 에모 아기씨가 말을 안 들은 거예요.”

중간에 헤키엔이 슬쩍 끼어들어 나름 플레누스 영지 경비의 안전성을 강조했지만 두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여덟 살짜리 애가 어떻게 우리 영지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지.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허 참.”

“말이 왜 안 돼요! 우리 영지 설탕도 내 딸이 만든 거나 마찬가지인데. 사탕무도 에모가 길렀고, 설탕을 만든 것도 얩니다! 마스터 하이트가 7서클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우리 에모 덕이라고요!”

“거짓말하지 말게!”

“진짜라니까! 내 자식이긴 하지만 어릴 때부터 평범하지 않았다고! 숟가락질, 포크질도 빨리 하고 마법도 직접 가르쳐달라고 말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애 엄마랑 같이 공 만들어주고 그랬어요! 글도 스스로 익혀서 어느샌가 보니 책을 줄줄 읽었고!”

씩씩거리며 플레누스 자작이 숨을 고르자 허공에서 마법을 발동 일보 직전 상태로 두고 대기 중이던 마스터 하이트가 말을 보탰다.

“에모 님 덕분에 제가 7서클이 된 건 사실입니다. 그때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 벌써 죽었겠죠. 두 분 다 어른이시니 진정하시지요. 아이들이 보고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지요. 영지의 수장으로서 모범이 되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플레누스 자작과 리어펠 백작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얼굴색이 제 빛깔로 돌아온 리어펠 백작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 알려다오. 나는 내 영지민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리어펠 영지에서 잘 자라는 게 감자밖에 없다고 하셨어요. 집에서 골렘으로 봤거든요. 맞죠?”

“맞다. 일부러 심는 것도 아닌 감자만 잘 자라지.”

“그러니까 감자를 먹으면 돼요. 감자는 독이 아니야. 사람이 먹어도 죽지 않아요.”

리어펠 백작은 밀려오는 허탈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전쟁터의 한복판에 가신들을 끌고 뛰어들 정도로 용감한 아이는 좌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감자는 먹을 수 있어! 내가 먹어봐서 알아! 감자를 먹어야 해요! 그러면 적어도 굶어 죽진 않아. 다들 내 말을 못 믿을 거 알지만 동화책이 틀렸어요! 샤키리 여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어. 감자는 식량이에요!”

그러자 에모가 딛고 있는 땅 위로 거대한 문장이 나타났다. 플레누스 영지에 사는 자라면 흔하게 보는 여신의 문장이었다.

“백작님, 신력입니다. 거의 대신전에서나 나타날 정도의 크기, 영애가 신의 이름을 걸어서 신의 문장이 나타난 겁니다. 말한 내용이 거짓이면 벌이 내려질 겁니다.”

부상자의 치료를 위해 따라온 신관이 덜덜 떨면서 하는 말에 그는 눈을 뜨고 여름 햇살보다 더 눈부신 광경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넓은 밭의 해바라기들이 전부 꽃송이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마치 대지의 여신을 경배하듯.

“다들 겁이 많아서 못 믿을 테니까. 감자가 식량이라는 걸 제가 증명하겠어요. 앞으로 사흘 동안 여기서 세 끼 다 감자요리를 먹을 거야. 내가 안 죽으면 감자가 식량인 게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지로 돌아가서 감자 드세요!”

“네가 태어나고 플레누스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고 하더군. 대지의 여신께서 사랑하신다는 소문도 돌더구나.”

리어펠 백작의 말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아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과거부터 신의 사랑을 받는 자는 범인과는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용사도 튼튼한 몸에 엄청난 마나를 가졌으니까.

하지만 에모가 여신에게 받은 건 책과 요리도구뿐이었다. 그래서 피스는 로브의 모자를 벗고 소리쳤다.

“에모 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정 못 믿으시겠으면 저도 같이 감자를 먹겠습니다. 그럼 확실하게 증명이 되는 거잖아요?”

멀리서 봐도 눈에 띌 정도로 대단한 미모를 가진 아이였다. 아마도 놀이친구일 게 분명한 아이가 저렇게 말하니 백작도 할 말이 없어졌다.

신의 문장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곧 투명한 반구를 만들며 아이들의 위를 덮었다. 같이 서 있던 어른들은 번쩍이는 빛과 함께 플레누스 자작의 앞으로 이동되었다.

“시, 신언. 신언입니다. 여신께서 이 증명을 보장하시니 나의 아이들아, 지켜보아라. 증명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대들이 할 일은 오로지 이것뿐이니라. 어길 시에는 내가 친히 벌을 내리리라.”

양쪽에 있는 치료 담당 신관들이 하는 말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묻지도, 뭐 하지도 말고 감자 먹는 거 지켜봐. 허튼짓하면 죽는다.

대륙 역사서에 에우데모니아 플레누스의 이름이 처음으로 박히게 되는 일명 ‘삼일 감자증명’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