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귀(劌)

유진후 당신, 무척이나 바보 같은 남자야. 죽어 가던 내가 인혈귀(人血鬼)로서 눈떴던 그날, 예전의 우리들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는 걸 알잖아. 인간으로서의 나도, 혈귀로서 불완전했던 당신도 이미 죽고 없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당신은 내 손을 놓지 못하고 있어.

26년 전, 유가의 배반자이자 진후의 생모인 최하련과 함께 도망쳤다고 알려진 VS(Vampire Slayer) 아시아특별지부의 마스터 민기환.
1여 년 전, 배다른 동생인 진후에게 직계의 힘을 빼앗기고도 살아남은 유가의 장녀, 유진영.
그리고…… 웃음기 어린 표정 속에 음습한 속내를 감춘 사혈귀들의 귀주(鬼主) 최인혁과, 미쳐 버린 그의 연인 강혜진.

시야를 살리기 위해 진혈귀들의 귀주가 된 진후가 맞닥뜨린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기환과 인혁의 공격이었다. 한국의 혈귀들을 말살시키기 위한 VS의 카인 프로젝트, 그리고 과거의 잊혀진 원한들로부터 비롯된 핏빛 복수. 그들은 밀려드는 위험 속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닥뜨린 진후는 시야를 무사히 탈출시키고자 하고, 결국 그 누이인 진영에게 무참히 끌려가고 마는데…….



<2권 중에서>

그 미칠 듯한 마지막 순간, 진후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던 말들을 떠올린 시야는 이를 악물었다. 아이가 생겼으니 더는 피의 속박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였던가. 가장 강력한 진혈귀의 인(印)도 새겨놓은 데다, 이제는 자신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어서 도망치라고 말했던 그 남자.
어둠이 내려앉은 유리창 너머로 참담히 일그러진 그녀 자신의 표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새하얀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숨 막히는 경악과 절망이었다.
‘유진후…… 당신, 지금 어디에 있어? 살아있기는 한 거야? 아니면…… 정말로 죽어버린 거야? 내 아버지가, 시혜가…… 우리 아이가 그랬듯 당신 또한 유진영의 손에 죽은 거야? 아니지? 그건 아닌 거지? 대답해, 유진후……!’
그녀는 죽지 못하도록 영혼마저 붙잡아둔 주제에, 정작 저는 제 누이의 손에 죽기 위해 혼자 남아버린 남자. 그녀의 모든 것을 저에게 얽매어놓고는, 몸도 마음도 저에게 길들여놓고는 막상 그녀 혼자 덩그러니 남겨버렸다. 어떻게…… 그가 그녀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사랑한다고 한 주제에,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그녀를 원한다고 말했던 주제에……!
유리창에 비친 또 하나의 그녀 자신이 나지막한 흐느낌을 토해내려는 순간, 시야는 그것을 거세게 후려쳤다.
와장창……!
요란한 소음과 함께 유리가 산산조각 났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시야는 용케 깨지지 않은 유리조각마저 움켜쥐었고, 있는 힘껏 손에 힘을 가했다. 한순간 화끈거리는 통증이 스치면서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아, 아가씨!”
“맙소사, 시야야! 무슨 짓이야! 소, 손에서 피가……!”
아프지 않아. 전혀 슬프지 않고 분하지도 않아. 시야는 몇 번이고 제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 남자, 저 스스로 엄청나게 잘난 줄 알고 있는 유진후가 벌인 짓거리였다. 오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뒤쫓아 온 그였고, 덕택에 기환과 카유키, 인혁이 합동으로 펼쳐놓은 함정에 걸려든 진후였다.
어디 그뿐일까. 그녀에게 이별 통보나 다를 바 없는 말을 내뱉은 것도 다름 아닌 유진후, 그 남자인 터. 생각할수록 가관이었고, 멍청하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그녀를 인혈귀로 만들어가면서까지 곁에 둔 주제에,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허망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그녀의 손을 놓아버린 남자라니.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정신없이 쏟아져 내리는 이 눈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째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걷잡을 수 없는 흐느낌이 치밀어 오르는 것일까……. 그녀는 더 견디지 못하고 절규 어린 비명을 토해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유진후, 내가 인혈귀로 눈뜬 이후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당신을 미워했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미치도록 당신을 원해. 내 곁에서 살아있는 당신이었기에 미워할 수도 있었고 사랑할 수도 있었다는 걸 알아. 평생토록 예전의 한시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혈귀로 살아야 한다 해도 좋아. 예전에 그랬듯 보름마다 한 번씩 당신의 피를 마셔도 좋고, 다른 어떤 것이라 해도 상관없어. 그러니…… 제발 돌아와. 당신이 있어야만 내 사랑도 증오도 살 수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