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까지만 여기 있을 거야.”
잔잔한 지우의 목소리가 사념에 젖은 은호를 흔들어 깨웠다.
“!”
“풋, 놀라는 척 하긴.”
“일 년이라고 했잖아.”
“별 걸 다 기억하네. 홧김에 한 소리였어.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어, 이렇게 사는 거.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난 알아. 사랑이라는 게 죽었다 깨어나도 머리로 안 된다는 거. 머리 밖에는 없는 남자, 가슴은 다른 데 둔 남자, 더 지켜볼 이유가 없잖아. 밥 굶지 말고 그 여자 만나서 다시 시작해.”
“그런 말이 나와?”
감정이 격해진 은호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그것처럼 낮게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 같은 지우의 눈빛에, 은호의 눈자위에 눈물이 차올랐다.
텅 빈 눈동자. 편안해 보일 만큼 텅 빈 눈동자가, 이전 시간 그곳을 채우고 있던 이의 이름을 깨닫게 만드는 것 같아 가슴이 욱신거려왔다.
“널 놓아주는 거야.”


[미리보기]

온 세상이 멈추어 선 것 같은 중에도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계바늘처럼, 까맣게 타들어가는 이의 눈에 비친 호수는, 청명한 수면 위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아름다웠다. 감히 아름답다는 말로 그 모습을 다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호흡을 내쉴 때마다 물안개를 닮은 입김이 새어 나올 만큼 추운 날씨였다. 하지만 싸늘한 기온에 소름이 돋는 살갗과 달리, 시린 바람은 끝내 심장에 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뭉근한 더위에 찌든 것처럼 벌써 여러 날 째 답답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슴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박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은호는 깊은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호수 가장자리에 살얼음을 얼게 만든 시린 바람은, 끝내 폐부로 스며들지 않았다.
그 때였다.
“아저씨가 저랑 결혼할 사람, 맞죠?”
낭랑하다고 해야 할지, 또랑또랑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목소리가, 그의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벙어리장갑을 목에 두른 소녀의 얼굴을 알아본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동그란 코끝이 빨간 걸 보니 방학 내 머물고 있는 별장에 들렀다 온 모양이었다.
“많이 컸네?”
“정말 제가 아저씨랑 결혼을 하는 거냐구요?”
초등학교 오 학년이나 되었을까. 양 갈래로 딴 머리 끝에 갈색 깃털을 매단 소녀의 눈빛이 짐짓 심각해보였다. 소녀의 심각한 눈빛은 ‘생기‘를 잃은 은호에게 묘한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그게 궁금해서 날 찾아 나선 거니?”
“대답이나 하세요. 전 지금 뒤로 넘어가기 십분 전이니까요.”
“하하하.”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시원하게 웃는 은호를 아이가 째려보았다.
“아저씨, 전 지금 무지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다구요.”
“꼬마야!”
“지우.”
“응?”
“꼬마가 아니라 지우예요, 권 지우.”
“아! 그래, 지우야. 그 얘긴 어디서 들었니?”
“할아버지요.”
한글을 떼기 전부터 들어온 이야기였다. 우습긴 하지만, 잔뜩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꼬마가 태어나기 전부터 들어온 이야기이기도 했다.
‘잘 들어라, 은호야. 너에겐 정혼한 아이가 있다.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꼭 그 애와 혼인을 해야 한다. 알겠느냐?’
‘정혼’이란 말을 이해하기 전엔 멀뚱한 표정으로 할아버지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 말을 이해할 즈음엔 괜한 두려움에 몸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사춘기를 지나는 사이, 은호는 그때껏 변치 않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괜한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듬직한 사내가 되었다.
“몇 학년이지?”
“오 학년이요.”
표정을 보아하니 아이는 오늘 처음 정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듯 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 줘야 할지, 잠시 은호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를 좇는 지우의 눈동자가 눈(雪)처럼 빛났다.
“아저씨 이름이 은호, 맞죠?”
“어?”
“우리 악수해요.”
은호는 아이가 내민 손을 얼떨결에 잡았다. 손바닥 안으로 쏘옥 들어오는 손마디가 겨울바람만큼이나 차게 느껴졌다.
“아저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나서 혼났지 뭐예요. 우리 전에도 몇 번 본 적 있죠?”
“맞아.”
“잘해 봐요, 우리.”